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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태조 7년(1398) 8월, 왕이 병환으로 병석에 있을 때다. 도성 안의 공기는 몹시 술렁거려, 이곳저곳에 두서너 사람씩 모여 서로들 숙덕숙덕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어젯밤 대궐 안에서는 큰 난리가 일어났다네.”
“대궐 안에서? 난리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말 말게, 이 사람아. 세자가 피살되고 공신들이 모두 맞아 죽었다네!”
하고 곁들었다.
“이거 세상이 또 뒤집히려는 게로군!”
아까 반문하던 사나이가 이렇게 뇌까리자, 이번에는 맨 처음 서두를 꺼내 놓던 젊은이가,
“뒤집히긴, 이 사람. 한번 뒤집혔던 게 그리 쉽사리 또 뒤집혀? 그 방원이라는 자가 세자 자리가 탐나서 장난한 짓이지!”
하고 응수했다. 사실 이들의 말대로 난리는 났었다. 하룻밤 사이에 대궐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참변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태조의 다섯째 왕자인 방원은, 자기가 부왕의 등극을 위하여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또 그러한 공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인격으로 보나 중망으로 보나 세자의 자리는 마땅히 자기에게 돌아오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부왕 태조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를 사랑하던 나머지 부당하게도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려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정도전이 깊숙하게 관여하였던 것이었다. 여기에 격분한 이방원은 그의 심복 하륜(河崙) 등과 모의하여, 마침내 골육상잔의 참극을 빚어냈던 것이다.
하륜은 태조 밑에서 관직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태종에게 중용되어,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꾀와 지모가 출중하고 완력이 대단했으며 남의 관상을 잘 볼 줄 알아서 누구든 한번 보면 능히 그 장래를 판단하였다. 일찍이 태종 방원이 장가를 들 때에, 마침 그 잔치에 참여하였다가 방원의 상을 보고는 반색하여, 방원의 장인되는 여성부원군 민제를 보고,
“당신의 사위야말로 장차 세상에 으뜸가는 인물이 되겠소이다.”
하고 그 뒤부터 민제를 통하여 방원과 가까이 하면서 힘껏 그를 도왔으므로 방원도 그를 가장 신임하게 되었다.
태조 7년(1398) 8월, 하륜이 충청감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는 날, 방원은 작별인사 겸 그를 남대문 밖 사저로 찾았다. 그때 하륜은 풍문으로 정도전·남은·유만수 등이 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고 있다는 내막을 얻어듣고 있었다. 당시에 태조가 병이 들었는데, 정도전이 태조의 요양을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의논하자는 핑계로 모든 왕자를 불러 이 기회에 난을 일으켜서 대궐 안에서 한씨 소생 왕자들을 처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하륜이 놀라서 방원에게 통고하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그가 찾아오긴 했으나 좌석에 이목이 많고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방원이 술 한 잔을 따라 하륜에게 권하였다.
“하감사! 이 술은 작별주니 마시고 부디 괄목할 치적을 거두고 보국안민에 힘써 주오.”
이에 하륜은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륜은 술잔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엎질러버렸다. 이것을 본 방원은 그의 공손하지 못함을 괘씸히 여기는 듯, 만면에 노기를 띠고 일어나 문을 차고 나가버렸다. 좌중에 냉랭한 공기가 감돌 때 하륜은 여러 빈객을 향하여,
“내가 갑자기 수전증이 일어 잔을 놓쳤더니 이제 왕자께서 진노하신 모양입니다. 내 잠깐 나가 사과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변명을 한 후, 밖으로 뛰어 나와 말도 타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방원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방원의 집 대문 앞에 이르러서야 방원과 만나게 되었다. 방원은 그의 거동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러자 하륜은 입을 가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시늉을 해보인다. 방원은 더욱 괴이하게 여겨 그를 침방으로 불러들여 놓고, 좌우를 모두 물러가게 했다. 하륜은 그제야 나직한 목소리로,
“위급한 일이 다가왔기에, 이목의 번잡함을 피하고자 일부러 술잔을 엎었나이다. 즉 그 술잔처럼 둘러 엎어질 환란이 다가오고 있소이다.”
하고는 방원의 귀에 입을 대고 정도전·남은·유만수 등이 여차여차 모의하고 있다는 이야기며 언제 거사하기로 작정되었다는 전후 사정을 고해 바쳤다.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는 이설이 구구하여, 혹은 하륜이 아니라 방원의 심복 이무가 거짓 무고를 하였을 뿐, 당시 정도전 일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하륜의 고변을 듣고 난 방원은 놀라움보다 분노가 앞서, 치를 떨고 있다가 한참 후에 조처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은,
“안산군수 이숙번은 지략이 출중하오니, 그로 하여금 별초군 3백 명을 인솔하고 올라오게 하여 정도전의 무리를 소탕함이 옳을까 합니다. 그리고 두 분 대군(세자 방석과 형 방번)의 조처는 처분대로 하십시오.”
하고 계책을 말하고 나서 몸을 일으켜 작별을 한 다음 남문 밖 사저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러 빈객들과 술을 나누다가 작별하고 나서 자기는 임지로 떠났다. 한편 방원은 앞서 하륜이 세운 계책대로 급히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서 별초군을 거느리고, 그날 밤 어둠을 타서 정도전·남은·유만수 등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난의 책임을 도리어 세자 방석과 정도전 일파에게 돌려 태조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잡아, 멀리 귀양보내는 척하고 중도에서 살해하고, 그 형 방번도 같은 방법으로 죽여버렸다.
이방원의 거사가 성공한 데는 후일 왕후가 되는 부인의 준비와 노력이 컸다. 곧 원경왕후의 동생 대장군 민무구와 장군 민무질과 함께 모의하여 병기와 말을 몰래 준비하여 태종을 응원할 계책을 세우고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후일 태종이 《고려사》에 나오는 왕건(王建)의 부인 유씨(柳氏)의 일을 읽어 보고 세종에게 이르기를,
“정사(定社) 때에 너의 어머니의 도움이 매우 컸고, 그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병기를 정비하여 기다린 것은 유씨가 고려 태조에게 갑옷을 입힌 것보다 그 공이 더욱 크다.”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거사의 소식을 들은 태조는 천만 뜻밖의 일에 너무도 놀라워하며 어안이 벙벙해했다. 정도전 등의 죽음은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방석·방번의 피살에 대하여는 크게 진노하고 또 상심하였다. 이를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강비가 간 뒤,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일념에 병까지 얻었는데, 그래도 그의 소생 형제가 있기에 마음을 붙여 오던 태조이다. 사실 강비에 대한 태조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강비 승하 후에도 자기 주위에 두기 위해서 도성 안에는 능을 쓰지 않는 원칙을 어기고, 강비의 능을 서대문 안에 조성하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다. 정릉은 태종이 즉위한 후 도성 밖으로 옮기라는 왕명으로 지금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정릉 자리로 옮겨지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이러한 터에 이제 그 상념이 오죽하랴…….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방원을 불러들여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고 방원을 불러,
“너는 임금 자리만 생각할 뿐, 천리(天理)도 인륜도 모르는 놈이로구나! 네 아무리 임금 노릇을 하고 싶어도 내 이 자릴 내주진 않을 테다.”
하고 소리 높여 질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욕을 하고 꾸짖어도 쓰라린 심사는 풀리지 않았다. 가슴 속에 타오르는 노여움의 불길, 그리고 강비에 대한 미안하고도 그리운 정, 살해된 두 아들을 향한 무한한 연민,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인 것을! 인생이란 허무할 뿐인데……! 이런 착잡한 분노와 애수의 상념으로 태조는 잠을 못 이루었다. 고민 속에 며칠을 지내면서 태조는 드디어 결심을 하였다.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전해주고, 자신은 한 많은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태조 7년(1341) 9월의 일로 이때 전위를 받은 이가 곧 제2대 정종이니, 정종은 즉위하자 바로 부왕을 높이어 상왕이라 존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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