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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북인의 득세와 영창대군의 출생

임진왜란이 종식되면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던 당시 정국에 북인들이 득세하였다. 북인들은 이전 동인에서 남인과 함께 분당한 세력들이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진 것은 임진왜란 전의 일로서, 사실 동인 내에는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을 지닌 정치집단이 있었다. 특히 조선 붕당의 특징이라고 말해지는 학연으로만 보더라도, 이황의 문인이 있는가 하면, 서경덕이나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포함되었다. 이황이나 조식의 학문 성향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태생에서부터 갈라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것이 정여립 사건과 이후 세자를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서인에 대한 대처방식을 놓고 서로 갈라졌다. 서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인물들이 북인으로, 온건한 입장을 보이던 이들이 남인으로 각각 분당되었다. 이들을 학통으로 본다면 남인은 이황의 문인들이, 북인은 서경덕이나 조식의 문인들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 남인의 유성룡 중심으로 전시체제가 운영되면서 잠시 종식되었던 양측의 대립은 임진왜란 후 유성룡의 처리문제가 대두되면서 표출되었다. 선조 31년(1598) 유성룡이 중국 측에 파견될 사신으로 결정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유성룡이 노모가 연로하여 갈 수 없다고 고사하였다. 그러자 북인들은 대신으로서 왕의 명령을 거스렸으니 잘못이라고 비난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인들은 이 죄목에 더해 유성룡을 논박하였다.

“계사년(1593년, 선조 26)과 갑오년(1594)에 적세(賊勢)가 겨우 후퇴하였고 양호(兩湖 : 전라도와 충청도)가 아직 온전하였으니, 만약 그때 중국에 호소하여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으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시 회복하는 방책을 거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화친하자는 말을 일으켜서 드디어 강화하는 계획을 이루어 인심이 풀리고 국세가 부진하게 되어 오늘의 뭉그러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책임을 씌웠다. 사실 임진왜란 중 상당수의 의병장들이 이들 북인 출신들이었다. 그런 만큼 강력하게 척화를 표방할 수 있었다. 계속된 북인들의 주장으로 결국 유성룡은 실각하게 되고, 동시에 남인들 대다수가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정국은 북인들이 주도하였다.

병산서원

1613년에 정경세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였고, 1863년 ‘병산’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경북 안동시 예천면 병산동, 사적 제2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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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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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와중인 선조 39년(1606)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인목대비는 연안 김씨 김제남의 딸로, 선조 35년(1602) 의인왕후 박씨 승하 후에 계비로 책봉된 인물이었다. 영창대군의 출생은 조정에 한차례 파란을 예고하였다. 선조의 경우는 그간 적자가 없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후궁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적자가 출생하자, 조정 신료들 간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은 이전의 세자인 광해군을 지지하는 측과 새롭게 태어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이첨, 이경전, 정인홍 등이었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대표 인물이 유영경이었다. 한편 이 즈음 북인들은 다시 소북이나 대북이니 하여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유영경은 선조 35년(1602) 영의정에 제수되었던 인물로, 유영경이 영의정에 재직하는 동안은 소북세력들 중심으로 정치를 하였다. 그는 선조 39년(1606)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종 때 광평대군과 임영대군이 출생할 때의 전례를 들어 조정의 모든 관리들을 데리고 가서 하례를 들였다고 한다. 이를 놓고 항간에는,

“이는 유영경이 임금의 뜻을 맞춤으로써 자기의 위치를 굳히려는 계책이다.”

하며 비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유영경은 자신의 아들로 선조의 사위이기도 한 전창위 유정량에게서 선조의 의중이 영창대군에게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조 34년(1607) 선조가 병환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선조는 인심이 동요하고, 첫째 아들인 임해군이 혹 딴 마음을 먹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여, 대신들을 불러 자신의 의중을 밝히려고 하였다.

“대신들을 불러들이라.”

선조는 명을 내렸다. 이때 전·현직 대신들이 국왕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이미 대궐 안에 대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유영경이 나서서 말하기를,

“지금 내리신 밀부(密符)에서는 현직대신만을 부르셨소.”

하여 현직 대신들만이 어전으로 들어가고 전직 대신들을 물러가도록 하였다. 유영경의 의도대로 현직 대신만이 참석한 자리에서 선조는 세자, 즉 광해군에게 전위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자 유영경 등은

“이번 전교는 뭇 사람들의 심정 밖에 나왔습니다.”

하면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전위하는 것이 여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창대군의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당시 어전에서 논의되던 말은 곧바로 항간에 유포되었다. 그러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의 이경전·이이첨 등이 이산해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유영경이 세자를 바꾸려는 음모가 명백히 드러나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합천에 기거하던 정인홍에게 사람을 보내 상소를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대북세력을 이끌어들이려고 한 것이었다. 정인홍은 다음해 1월 19일 장문의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비롯해 그가 끌어들인 세력들을 ‘종사를 망하게 할 자’니 ‘국가와 신민에게 화를 끼칠 자’니 하면서 비난하였다. 정인홍의 상소를 필두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세력의 상소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유영경 자신뿐만이 아니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아울러 정인홍 등을 ‘양궁(兩宮)을 이간시키고 사림에게 화를 입히려는 세력’이라고 규정하면서 비난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장차 궁궐 뜰에서 국문하자고 요청하였는데, 선조가 이 와중에서 승하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왕위는 광해군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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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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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북인의 득세와 영창대군의 출생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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