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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노론의 승리로 일단락된 논쟁
회니시비
懷尼是非갑술환국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서인으로 넘어갔다. 남인들은 이른바 ‘명의죄인(名義罪人)’이라는 죄목에 걸려 축출되었다. 즉 국모를 폐출시키는 데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이후 남인들은 정치적으로 당색을 표방하며 진출할 수 없었다. 다만 개별적으로 출사하기는 하였다. 이렇게 서인 주도의 정국하에서 소론은 왕세자의 보호를 자처하였다. 왕세자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릴 때 왕세자는 노론의 이세백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는데, 이세백은 옷을 뿌리치고 자리를 피한 반면 소론의 최석정은 죽음으로서 세자를 돕겠다고 하였다.
“신이 감히 죽기로써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노론과 소론이 세자의 지지 여부를 놓고 대립하던 와중인 숙종 32년(1706) 소론의 임부와 남인의 이잠이 상소하여 1701년 장희재의 사촌 윤순명의 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김춘택을 비롯한 노론들이 동궁을 모해하려 한다는 말이 나왔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임부와 이잠을 처벌하는 것으로 매듭되기는 하였지만, 양자 간의 대립은 본격적으로 노골화되었다.
다만 이러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진행되던 중에 숙종은 박세채가 제창한 황극탕평론을 정치에 적용하여 표면적으로 정국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탕평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서술하겠다. 정국의 안정을 토대로 민생의 폐단이 되었던 양역 문제에 대해서 손질하였으며, 북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안정은 언젠가는 다시 노골화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이 숙종 말년 경에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이미 오래 전부터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불리는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된 회니시비는 윤휴에 대한 송시열과 윤선거의 입장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윤휴는 송시열·윤선거 등과 교류하던 인물로, 그는 현종 초에 발생한 제1차 예송에서 송시열 등 서인 측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하며 3년복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숙종 초 남인들이 집권 당시에 국왕의 부름으로 조정에 나와 활약하다가 경신환국 이후 복선군 형제와 친밀하였고, 남인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체찰사부의 복설을 주장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처벌되었다. 평소 윤휴의 학문 태도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이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휴는 항상 퇴계·율곡·우계(성혼) 등 여러 현인들의 단점을 말하기 좋아하고 주자를 기탄없이 배척했으니 이는 사문난적이요, 이단 중에서 심한 자이다.”
그런데 절친한 윤선거가 윤휴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의 학설이 잘못되었다고 강변하면서 그와 절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윤선거는 윤휴를 지지하였다. 이 논쟁은 자칫 개인적인 미움으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양자가 학문을 대하는 입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송시열의 경우 주자의 학문을 절대시하는 자세를 보인 반면, 윤휴나 윤선거의 경우는 주자도 비판받을 수 있다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던 것이었다.
윤휴를 둘러싼 송시열과 윤선거의 갈등은 이후 윤선거 사후에 다시 한번 재연되었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부친 사후에 자신 아버지의 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윤증의 부탁을 받고 송시열은 못마땅한 것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윤선거와는 절친한 사이여서 그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문인이 되는 윤증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묘갈명을 지어서 보냈는데, 이를 받아 본 윤증은 대단히 실망하였다. 비록 못마땅한 것이 있을지라도 죽은 자의 비문을 지을 때는 칭송하게 되는 법. 그러나 송시열은 비문 속에 그간의 서운함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 아니라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노비 복장으로 변장해서 강화도에서 몰래 나온 사실을 들어 죽어야 할 의리가 있는데도 죽지 않고 비굴하게 삶을 구걸하였다는 내용까지도 기술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이 지은 비문을 받아보고 못마땅하였으나, 그래도 송시열이 스승이므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몇 번을 고쳐서 다시 써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송시열은 윤증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휴 문제로 시작된 논쟁은 이후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대에 이르러까지 지속된 것으로, 본격적인 회니시비가 시작된 것이었다. 회니시비에서 ‘회’는 회덕을 지칭하는 것으로 송시열이 회덕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며, ‘니’는 니산으로 윤증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송시열과 윤증은 서로가 합칠 수 없는 평행선을 가게 되었다. 이후 윤증은 송시열의 처신에 대한 것을 문제삼는 등(이른바 辛酉擬書) 양측의 공방은 계속되면서 숙종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숙종 40년(1714) 윤증이 사망하자, 소론 측 인사인 최석정은 그의 제문을 지었다. 그런데 최석정은 윤증의 제문 속에 송시열을 가리키면서 비난하였다.
“북벌한다는 대의를 허명으로만 부르짖고 실지(實地)가 없다.”
최석정이 지은 윤증의 제문이 공개되자, 노론 측에서는 즉각적인 반발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 황상노의 상소가 제출되었고, 또 충청도 유생 성대령 등 2백 명의 연명상소가 있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는 사직 상소를 올리고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하였다. 이때 숙종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면서 개입하지는 않았다.
양측의 대립은 다음해 숙종 41년(1715) 《가례원류》가 간행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주자의 《가례》를 바탕으로 여러 유학자들의 예설을 망라해 놓은 책이었다. 윤선거와 동문인 유계가 공동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것으로, 두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윤증이 이를 맡아서 완성시켜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계의 손자 유상기가 노론의 좌의정 이이명에게 《가례원류》를 간행해달라고 청탁하였다. 청탁을 받은 이이명은 이를 숙종에게 건의하여 허가를 받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유상기가 책을 보관하고 있던 윤증과 상의 없이 진행하면서, 책을 유계가 단독으로 지은 것이라 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반면 윤증은 이 책이 부친인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으로 집필했다는 입장을 말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고 초본을 넘겨주지 않다가 유상기의 강청으로 어쩔 수 없이 넘겨주게 되었다.
초본을 넘겨 받은 유상기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서문을 받고 정호의 발문을 받아 간행하였다. 그런데 서문과 발문에서 모두 윤증을 비난하였다. 이때 윤증은 그 간행을 보지 못하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가례원류》가 간행되어 숙종에게 올려졌는데 숙종은 발문에서 정호가 윤증을 비난한 글을 보고는 그를 파직하는 한편 윤증을 추모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한 유림 도덕을 존모(尊慕)했으니
소자(小子) 또한 일찍이 그를 흠앙했네.
평생에 그의 얼굴 알지 못한지라
죽은 날에 한스러움이 더욱 참을 수 없네.
생삼(生三 : 君·師·父)을 비록 한결같이 섬긴다지만
아무래도 경중의 다름이 있거니와
가소롭다 저 논사(論思)의 장이(필자주 : 정호를 지칭)
대로(大老 : 송시열을 지칭)의 모함에 감심(甘心)했구나.
숙종의 판정이 내려지자 소론 측에서는 고무되었다. 그러나 노론 측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후 이를 두고 전국적으로 찬반양론이 들끓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수그러들 것으로 판단하였는지 숙종은 수수방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정국이 혼란되자, 숙종은 더 이상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판정을 내리고 정국을 안정시켜야 하였다. 이에 숙종은 윤증이 스승을 비난했다고 하는 신유의서(辛酉擬書)와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의 비문을 들이라 하고는 다 보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판정하였다.
“지금 그 의서(擬書)를 보건대 과연 지나친 말이 많고 비문은 원래 윤선거에게 욕이 미친 것이 없으니 전후에 여러 선비들이 송시열을 변명하다가 죄 받은 자는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
숙종의 이 같은 판정은 노론의 승리였다. 이를 가리켜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한다. 그간의 논란이 노론 측의 승리로 판가름나자, 노론은 여세를 몰아 윤선거 부자에게 그들을 높여 칭하던 ‘선정(先正)’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말 것과 윤선거에게 내린 시호를 거둘 것, 그리고 관직의 삭탈까지 요구,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숙종은 이에 머물지 않고 조정을 노론 중심으로 재편하여, 전일에 파직되었던 정호를 재기용하고 권상하·민진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바야흐로 노론 중심의 조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대원군은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새롭게 왕이 된 사람을 낳은 아버지에게 붙여지는 명칭이었다. 즉 후사 없이 왕이 승하하였을 때 왕실 내의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며, 이때 왕의 생가 아버지인 사친(私親)에게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역사상 우리는 대원군 하면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그 생부는 덕흥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의 생부는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다만 인조의 생부는 원종으로 추존되기도 하였다.
한편 국왕의 장인이나 공신에게는 부원군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부원군의 칭호를 내려줄 때 명칭은 흔히 그들의 본관에 맞추어 부여하였다. 숙종의 첫번째 부인인 인경왕후의 부친 김만기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두번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세번째 부인인 인원왕후의 부친 김주신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이 되었다. 김만기는 광산 김씨, 민유중은 여흥 민씨, 김주신은 경주 김씨였기 때문이다. 또 공신으로 부원군이 된 이항복의 경우 오성부원군에 책봉되는데, 오성은 그의 본관인 경주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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