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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11월 27일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은 25살의 나이로 정력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다. 일부에서는 예종의 죽음이 복상사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자세한 이야기에 대해 사실을 전해줄 것으로 생각되는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렇다 할 이유가 설명되지 않고 있다.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실에 커다란 현안을 남겨놓았다. 다름아닌 후사를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예종이 생전에 세자 책봉을 하였으면 문제는 간단하다. 물론 예종에게는 적자인 제안대군이 있었다. 그러나 예종 승하 당시 제안대군은 겨우 네 살이었다. 아직 세자로 책봉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사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따지고 보면 왕위계승에서는 한발 물러선 위치였다. 그러나 형인 의경세자가 일찍 요절함으로써 왕위가 예종에게 계승된 것이었다.
요절한 의경세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월산군이고, 둘째가 자을산군이었다. 이들은 아버지 사후에 할아버지인 세조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궁중에서 성장하였다. 이제 예종이 승하하면서 이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미 예종의 어린 아들 제안대군은 논의선상에서 배제되었던 것이었다. 아마 기록에 자세하게 나오지 않으나 당시 조정의 신료들 모두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당시 이 문제를 결정할 최고 책임자는 바로 왕실의 큰 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로서도 여간 고민스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문제를 너무 지연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러던 차에 신숙주는 권감에게 말하였다.
“국가의 큰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일찍 결정하여야 한다.”
즉 상주를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주를 결정한다는 것은 왕통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신숙주의 말을 들은 권감은 이를 정현조에게 전하였다. 정현조는 정희왕후의 사위였다. 정현조는 이어 정희왕후에게로 가서는 내시를 배제하고 직접 신숙주의 의견을 전하였다.
“청컨대, 주상자(主喪者)를 정하여서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소서.”
정희왕후도 이 문제가 시급하여 몇몇 중신들과 논의하였던 듯하다. 이때 정현조는 고관들과 정희왕후 사이를 몇 차례 왕래하면서 막후 조정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몇 차례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 후 정희왕후는 경복궁 강녕전 동북쪽에 딸린 방으로 행차하고는, 원상과 도승지는 들게 하였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권감·한계희·임원준 등이 차례대로 입시하였다. 슬픔에 젖어 있던 정희왕후에게 신숙주는 위로하였다.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정희왕후도 말문을 열면서 자신도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참석했던 재상들에게 물어보았다.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
과연 어느 누가 이 자리에서 특정인을 지칭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참석하였던 재상들은 이구동성으로,
“신 등이 감히 의의(議擬)할 바가 아니니, 원컨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
하며 정희왕후의 하교를 기다렸다. 물론 앞서 몇 차례 의견 교환이 있었으나 공식적인 국왕의 지명 절차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재상들의 의견을 들은 정희왕후는 비로소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자을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太祖)에 비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며 그대로 따랐다. 이제 비로소 주상자가 결정되었으며, 왕통 계승권자가 결정된 것이었다. 이로써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서 당시 13살이었던 잘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의문은 이미 잘산군의 형으로 그보다 다섯 살 많은 18살의 월산군이 있는데도 잘산군이 왕통 계승권자로 결정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정희왕후는 앞서의 하교에서 월산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잘산군에게는 남편이었던 세조의 말을 빌려 태조의 도량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잘산군이 보여준 태조의 도량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의경세자 사후 세조의 보살핌을 받던 월산군과 잘산군은 궁중에서 생활하였는데, 하루는 번개가 진동하여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마침 그때 내시 백충신이 그들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이 모두 넘어지고 넋을 잃었으나 잘산군만은 낯빛조차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세조가 범상치 않게 여겨 ‘이 아이의 기국과 도량은 우리 태조를 닮았다’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오산설림》에서는 세조가 정희왕후에게
“후일의 나라 일은 마땅히 이 아이에게 맡길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이후 성종 즉위 후 예부에 보낸 행장과 《성종실록》 총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 일화는 성종의 왕통 계승에 대한 합법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물론이다. 잘산군이 즉위하게 된 이유에 이런 일화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이때 주목되는 것은 잘산군이 바로 당대 최고의 실력자 한명회의 사위라는 사실이다. 반면 형 월산군의 처가는 순천 박씨 박중선 집안이었다. 집안의 위상으로 봐서도 한명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예종의 부인, 성종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어머니가 되는 인물이 바로 한명회의 딸이었다. 이런 처가의 배경은 아무래도 잘산군이 왕위에 즉위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예종 승하 후 다음날인 1469년 11월 28일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던 왕위 계승권자의 결정이 마무리되면서 성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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