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고자 노력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했으며 이기·윤원형 등을 삭훈하였다. 그러나 선조 8년(1575) 사림들은 각각 김효원·심의겸을 중심인물로 동인,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정론도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선조 23년(1590)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파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던 중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를 설치하게 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게 하였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깨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 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졌다. 더욱이 왕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는 유언을 하였으나 바로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었고, 유언은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국외 | 시대 | 조선 |
| 1568 | 이황,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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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9 | 조광조에게 문정공(文正公) 시호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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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이, 《동호문답》 올림 |
| | 백련사 동종 만듦 |
러시아제국, 노브고로드 시민 학살 | 1570 | 정공도감(正供都監) 설치 |
| | 《오례의(五禮儀)》 재간행 |
| | 조식, 《남명집(南冥集)》 편찬 |
| 1571 | 이이, 서원향약 만듦 |
예수회, 아메리카에 전도 | 1572 | 정공도감(正供都監) 혁파 |
| | 이산서원(伊山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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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보(琴譜) 간행 : 현재 전하는 유일한 고전악보 |
일본, 오다 노부나가가 실권 장악 | 1573 | 한성에 동묘(東廟)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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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서관(校書館), 향약(鄕約) 간행 |
명, 스페인이 광동에 상륙 | 1575 | 심의겸과 김효원의 동서당론 일어남 |
| | 이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바침 |
| 1577 | 이이, 《격몽요결(擊蒙要訣)》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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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언적 신도비 건립 |
| | 이이, 해주향약 실시 |
| 1579 | 조광조 신도비 건립 |
명,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 중국에 옴 | 1580 | 정철, 〈관동별곡〉, 〈훈민가〉 지음 |
| | 일본,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조공할 것을 요구 |
네덜란드, 독립선언 | 1581 | 이이, 《경연일기(經筵日記)》 완성 |
| | 노산군 묘비 봉분 조성 |
신성로마제국, 쾰른전쟁 일으킴 | 1583 | 이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함 |
| | 이탕개의 난 일어남 |
| | 경현서원 건립 |
| 1585 | 《경서훈해》 교정 |
무굴제국, 카슈미르 정복 | 1586 | 각 도에 향교제독관(鄕校提督官)을 둠 |
이탈리아의 갈릴레이, 피사의 사탑에서 낙체의 법칙을 실험함 | 1589 |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일어남 |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을 통일 | 1590 | 일본에 통신사 파견 |
| | 유성룡과 정인홍의 대립으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뉨 |
| | 정여립의 난 진압 |
명, 조선에 원군 파견 | 1592 | 임진왜란 일어남. 일본침략군 약 16만 명 조선에 침입 |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 발견됨 | | 신립,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대패 |
| | 이순신, 옥포해전과 노량진에서 대승, 거북선 사용 |
셰익스피어, 《리처드3세》 간행 | 1593 | 왜군의 철수 시작 |
| | 선조, 한성으로 귀환 |
| | 중강개시(中江開市) : 임진왜란 중 식량확보를 위해 교역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지음 | 1594 | 훈련도감(訓鍊都監) 설치 |
| 1595 | 각 도의 대도호부에 무학 설치, 군사 양성 |
| | 남한산성 수축 |
| | 병조, 무신에게 《기효신서(紀效新書)》를 학습시킴 |
명, 《본초강목》 간행 | 1596 | 오위제(五衛制) 복구 |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사카성에서 명의 사신 접견 | | 이몽학의 난 일어남 |
무굴제국의 악바르, 인도 통일 | | |
| 1597 | 20만의 일본군, 조선을 재침략(정유재란) |
| | 경현서원, 화재로 소실됨 |
프랑스, 낭트칙령 발표 (신앙의 자유를 확립) | 1598 |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함 |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 일본군, 전원 철수 |
| | 이순신, 《난중일기》 지음 |
| | 한성에 남묘 건립 |
| | 군적 정비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 1602 | |
마테오리치, 〈곤여만국전도〉 간행 | | |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죽음으로 튜더왕조 끝남 | 1603 | 유성룡의 관작을 회복 |
여진의 누르하치, 흥경(興京)으로 옮김 | | 중강 관시에서 은으로 상업세를 징수함 |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이대장군에 임명됨 | | |
| 1604 | 유정을 대마도에 보내 그곳 사정을 알아오게 함 |
| | 삼도수군통제사영을 고성의 두룡포로 옮김 |
| | 죽산(竹山)에 산성을 수축 |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지음 | 1605 | 호성원종공신 임명 |
영국의 셰익스피어, 《리어왕》, 《맥베드》 간행 | | |
| 1606 |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중건 |
| | 명으로 가는 사절단의 밀무역 통제 |
| 1607 | 경기·황해도에서 민란 발생 |
조선 선조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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