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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정몽주의 충절

선죽교의 핏자국

우왕을 폐한 후 백관들은 국왕의 옥새를 받들고 정비전(定妃殿)에 가져다 두었다. 우왕의 다음 왕을 세워야만 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왕씨의 후손을 골라 왕으로 세우고자 하니, 조민수가 우왕의 장인인 이임(李琳)의 인척관계로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우고자 하여, 이색에게 묻고 마침내 의논을 하여 창을 세웠다. 그가 바로 창왕이었다.

그러나 창왕도 오래 재위하지 못하였다. 창왕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서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창왕은 왕씨의 자손이 아니니 폐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 : 거짓을 폐하고 참된 것을 세운다)의 논리였다. 그리하여 창왕 1년(1389)에 창왕을 폐하여 강화로 추방하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맞아들여 왕으로 삼으니, 바로 공양왕(恭讓王)이었다.

이성계가 창왕을 폐출하던 날, 여러 장수들과 신하들 중에 벌써부터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이성계는 스스로 덕이 없노라 사양하고 공양왕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 포은 정몽주는 왕의 스승이 되어 정사를 보좌하였다. 그는 당시 제일의 명현으로 일편단심 왕씨의 조정만을 위하여 진력하는 터였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주위의 인사와 더불어 굳이 대의명분을 지키어 왕실 중흥의 위업을 이룩하려 했던 것이다. 정몽주는 처음에는 이성계와 같이 친명을 주장하고, 대내문제에 있어서도 이른바 ‘폐가입진’에 찬성한 구공신(九功臣)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 후 이성계가 영삼사사(領三司事) 내지 시중으로 있을 때에 그는 수시중의 직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성계와 그의 추종세력들이 날로 성하여 중외의 인심이 걷잡을 수 없이 쏠리고, 또 조준·정도전 같은 책략가가 그의 막하에서 이성계를 추대하려 하니, 정몽주는 분개하여 김진양 등을 언론직인 대간에 앉혀 틈을 타서 이성계를 배척하는 선봉에 서려 하였다. 이러던 차에 마침 명에 갔던 태자가 귀국하자 황주로 마중나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게 되었다.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여 곧 대간 김진양으로 이성계의 세력인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 등의 죄상을 탄핵하게 하여 이들을 개성에서 먼 곳으로 내쫓고 또 장차 이성계까지도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도리어 정몽주 이하 반대당을 속히 없애려 귀로 중에 있는 그의 부친을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정몽주는 방원 등의 반동적 거사가 장차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이성계를 문병하는 척하면서 그의 사저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방원은 정몽주가 제 발로 걸어서 찾아왔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날로 정몽주를 도모할 채비를 당장 갖추었다. 사실 이방원도 정몽주가 당대의 명현으로 백성들의 공경을 한 몸에 받고 있어서 섣불리 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또 가급적이면 그러한 어진 이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욕망이 컸기 때문에, 그날도 문병 온 그를 술과 음식을 내어 대접하면서, 그의 뜻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떠볼 양이었다. 이방원이 먼저 노래 한 수를 지어 보이며 화답하라고 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노래는 그대로 정몽주에게 절개를 굽힐 것을 은근히 전해본, 이방원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그때 정몽주는 방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받아들고 다음과 같은 노래로 화답을 하니, 이 노래가 바로 〈단심가〉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방원은 이 노래를 듣자 그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가만히 이지란을 불러, 그 뜻을 말하니 이지란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천명이 있을진대, 그 한 사람으로 하여 성사치 못할 리 없는데, 어찌 도덕군자요, 명현인 그를 살해하려는 겁니까. 이 사람은 비록 무식한 사람이지만 그 일에는 절대 참여치 못하겠소.”

이방원도 그 말이 옳은 줄은 알았으나 정몽주를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천재일우의 기회여서, 다시금 비장한 결심을 하고 심복인 조영규를 불러 분부하였다.

“그대는 군기고의 쇠도리깨를 가지고 급히 선지교 근처에 가서 은신하고 있으라. 조금 뒤에 정몽주가 그곳을 지날 터이니, 불문곡직하고 내달아서 때려 죽이고 돌아와 알리도록 하라.”

그러나 이방원 역시 탄식해 마지않았다. 한편 정몽주는 이성계와 이방원을 하직하고 돌아오면서 생각해보았다. ‘그들의 동정으로 미루어 볼 때 필경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를 근심하는 일념에 가득 찬 그의 가슴 속에는 어느덧 검은 구름장이 뒤엉키기 시작하였다. 노충신의 얼굴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정몽주가 탄 말은 어느덧 선지교 가까이 다다랐다. 그때 문득 앞을 바라보니, 어떤 장대한 사나이가 쇠도리깨를 끌고 나타났다. 정몽주는 선뜻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하여 말을 멈추게 하고 뒤따라오던 녹사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오늘은 웬일인지 공기가 이상한 것 같구나. 나는 이미 마음에 정한 바 있으니 구태여 피하지 않을 것이나 너는 공연히 화를 당할 까닭이 없으니, 속히 이 자리를 피하여라.”

벌써 어떤 불상사가 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예측한 그는 오히려 녹사까지 화를 입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앞섰다. 그때 녹사 김경조는 공민왕 시절 시중을 지낸 김구주의 아들이었다. 성질이 충직한 사람으로 평소에 몽주의 인격을 흠모하던 터라 정몽주의 비장한 각오를 듣고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상공께서 변을 당하실 바에는, 소인이 어찌 편안히 살기를 도모하리까. 모시고 가겠나이다.”

그리하여 정몽주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고 기어이 뒤를 따랐다. 정몽주는 부득이 다른 하인배들만 떼어 보내고, 녹사는 뒤따르게 하여 말을 몰았다.

일설에는 앞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을 나와 도중 정승을 지낸 바 있는 그의 벗 성여완의 집에 들렀는데, 그는 마침 출타 중이었다. 정몽주는 그 집 술맛이 유별함을 아는 고로, 부득이 녹사를 시켜 하인을 불러내어 술을 내오라고 이르렀다. 안에서는 그가 자주 와서 술을 자시는 포은 상공인 줄 알고 술과 안주를 갖추어 진배하였는데, 포은은 몇 잔이고 술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녹사도 서너 잔을 먹게 한 다음 술상을 물리고 문밖으로 나와 말을 타는데, 말머리가 뒤로 가게 하여 거꾸로 가는 모양이 되었다. 녹사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정몽주는 대답하였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와 살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임을 당하기 싫어 아끼는 술을 많이 마셨고, 앞으로 달려들어 때리는 것을 보기 싫어서 이제 말을 돌려 타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녹사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참으로 포은의 충절에 감동해서였다고 한다.

정몽주는 말을 몰아 선지교에 당도하였다. 아까 그 장대한 사나이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쇠도리깨로 정몽주의 뒤통수를 향하여 내리치는 찰나, 녹사가 얼른 자기의 몸뚱이로 정몽주를 감싸 안았다. 먼저 녹사가 피를 토하고 떨어져 죽었고, 다음에 정몽주가 낙마하여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충신 정몽주는 대의에 빛나는 최후를 마쳤다. 쇠망해가는 고려 왕실을 떠받치고 있던 마지막 기둥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때 포은을 타살한 장사는 말할 것도 없는 방원의 심복 부하인 조영규였다.

정몽주의 묘

원래는 개성 인근의 해풍에 있다가 자손들이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장례에 사용되던 깃발 하나가 지금의 묘 자리에 떨어져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전한다. 묘역 입구에는 1699년 송시열이 찬하고 김수증이 쓴 신도비가 있다.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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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포은이 명을 마친 선지교에는 홀연히 대나무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선지란 종래의 다리 이름을 선죽(善竹)이라 고쳤고, 또 그 다리 위에 포은이 흘린 붉은 피의 흔적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몽주의 위국충절이 일편단심을 말해주고 있다. 사후에 이방원의 보고를 전해들은 이성계는 크게 노하였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으므로, 이성계가 아무리 노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성계는 마지못해 조준·정도전 등의 무리에 섞여 공양왕을 알현하고 아뢰었다.

“정몽주가 죄인들과 공모하여 착한 사람을 모해하려 하기로 그를 먼저 제거하였나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무리들을 모조리 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양왕은 그들이 청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몽주의 시신은 그냥 버려져 있었으나 송악산의 여러 사찰 승려들이 내려와 염습하고 풍덕 땅에서 장사지냈다. 뒤에 조선이 건국되고 정몽주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 땅으로 이장하였다. 태종은 자기가 주도하여 죽인 정몽주에게 직위를 내리고 치제(공이 많았던 신하에게 내리는 제사)를 명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된 뒤, 이방원과 남은 등은 비밀리에 조인옥·조준·정도전 등 50여 인과 협력하여 그의 부친 이성계의 추대를 모의하였다. 마침내 당시 시중 배극렴 등은 정비 안씨에게 공양왕의 부덕함을 아뢰고, 이를 폐하여 원주로 쫓게 한 다음, 옥새를 이성계에게 주어 대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여러 번 이를 거절하다가 마침내 수창궁 정전에 들어가 보위에 올랐다. 때는 공양왕 4년(1392) 7월이니, 포은이 죽은 지 넉 달 만의 일이며, 폐왕인 우와 창의 부자를 합하여 34왕 475년의 고려 왕실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태조가 등극한 후 새 임금을 배척한 고려의 구신들은 조준의 아우 조윤을 비롯하여 원천석, 김자수, 김진양, 서견, 이숭인, 이집, 이고, 윤충보,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등 쟁쟁한 전 왕조의 인물들로 모두 새 왕조에 불복하였다. 그 가운데 조준의 아우 조윤은 호조판서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였고 지금껏 써오던 윤자 이름은 쓰지 아니하고, 견(킗)으로 고치고, 또 자(字)를 종견(從犬)이라 하고, 두류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뜻은 ‘옛 주인을 잊을 수 없는 것이 개와 같다’,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함이 개나 다름 없다’ 는 뜻이었다. 이렇듯 많은 유신들과 전조의 구신들이 새 왕조를 반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에 출사를 거두하고 은둔한 인물을 우리는 ‘두문동72현’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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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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