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왕조사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중종이 등극하자, 연산군대의 폐정을 개혁하는 이른바 유신정치를 베풀었다. 먼저 성균관을 개수하고 전왕대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줌과 아울러 유학 진작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사림의 재진출의 길이 열리매, 앞서 갑자사화에 귀양갔던 유숭조 같은 선비들이 소환되어 중용되었다.
그때 사림 중에 조광조 등 연소한 선비가 있어 성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중종은 그들을 불러 요직에 기용할 뿐 아니라, 그들을 몹시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함경도 지방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을 기회로, 마침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학군자로 이름있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인 가운데 한 명으로, 김종직 이후로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중종 5년(1510)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중종 10년(1515) 알성시 별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벼슬이 높아갈수록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음먹고 있는 유자(儒者)의 이상정치(理想政治), 즉 도학정치를 실현해보려 하였다. 이들은 위민정치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으면서, 이를 위해 군주의 수신과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으며, 과거제의 대안으로 현량과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소학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워낙 신진기예들로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너무도 그 수단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또 자기네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기성 세력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중종 14년(1519)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들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왕에게 간청하여 이른바 위훈삭제사건 즉 중종반정의 공신 중 외람되게 공신의 작호를 받은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해버리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거추장스런 존재인 구세력을 내몰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었다.
남곤은 본래 문인으로서 촉망받던 사람인데, 조광조 등이 자기를 소인으로 지목하자, 그들 사림파를 항시 미워하여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위훈삭제사건이 일어나 그에게 좋은 구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 무렵 지동(地動)이 크게 일어나서 왕이 근심하는 것을 본 그는, 자기와 같이 남소인이란 지목을 받고 있는 심정과 모의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즉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서의 지동이라 하여 왕의 마음을 흐리게 하였다.
그 뒤 연거푸 말을 지어 퍼뜨리기를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또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천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해 바치게 하였다. ‘走肖’는 즉 ‘趙’ 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이리하여 중종의 마음을 격동시킨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밤중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홍경주는 전일 반정공신으로서의 그의 좌찬성 벼슬이 너무 과하다고 왕에게 아뢴 조광조를 밉게 보고 있던 터로, 그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왕의 빈(嬪)이 된 그의 딸을 충동하여 수시로 조광조를 참소케 하였다.
그러던 차에 조광조 일파의 ‘위훈삭제사건’이 일어나자 전일의 반정공신들이 모두 자기 벼슬을 빼앗길까 우려하여 대소동을 일으켰다. 남곤·심정·홍경주 일당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거짓으로 아뢰었다. 이때 중종은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조짐으로 꺼림칙하던 차에, 조광조 일파가 모반하려 한다는 말에 대경대노하여 즉시 무사들로 하여금 조광조·김식(金湜)·기준·한충·김구·김정·김안국·김정국·이자 등을 잡아들이라 하였다. 이 난데없는 밤중의 고변 통에 불려 들어온 조신들은 모두 벌벌 떨고 섰는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소리 높여 왕에게 간하였다.
“연소한 유생들이 때를 알지 못하고 예민한 수단을 부렸을지언정, 절대로 다른 뜻을 품지는 않았사오니 통촉하시와 용서하시옵소서.”
그의 늙은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들을 일단 하옥시켰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인데,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그 뒤 심정 등을 신임하였으므로, 그들이 국정을 뒤흔들게 되었다. 그로부터 정계는 늘 불안하고 명랑치 못하여, 이른바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든가, 정유삼흉(丁酉三凶)을 등용하고, 현량과에 급제한 여러 사람들의 홍패를 모두 거두는 등 실정(失政)이 거듭되었다. 중종은 재위 39년 만인, 춘추 57세에 승하했는데, 그는 아들 9형제와 딸 11형제를 두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