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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사와 수많은 장정들을 불러 모아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수양대군은 서서히 그 야심의 날개를 펼쳤다. 그리하여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단종을 보필하고 있는 고명을 받은 대신들, 그 중에서도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대사를 추진해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실로 수양대군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제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세 명의 대신 가운데 영의정 황보인이라든가, 우의정 정분 같은 사람들은 문제될 것이 없다 싶었지만, 김종서만은 워낙 녹록지 않은 인물이어서 수양대군에게는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김종서 생가터

김종서는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후의 세조)에 의하여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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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세종의 명을 받아 북방을 개척하고 육진을 구축하여 변경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의 숨통을 눌러 놓았던 김종서, 그는 문무 겸비의 큰인물로, 조정에서는 그 엄격하고 강직한 기질로 국사를 좌우하니 세상에서는 그를 호랑이 정승이라고 호칭하는 터였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고는 대사를 도모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다음, 친히 양정·유숙을 비롯한 몇 사람의 장사를 대동하고, 달빛이 희미한 초저녁에 말을 몰아 새문 밖 김종서의 사저로 향하였다. 문 밖에 당도한 수양대군은 큰 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하인을 불렀다. 그때 마침 저녁상을 물리고 난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꺼림칙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마 그가 어쩌랴 싶을 뿐 아니라 대군이 친히 내방한 터이므로 영접치 않을 수 없어 문 밖으로 나갔다.

‘성격이 호탕하고 용맹한 수양대군! 그러지 않아도 들리는 소문에 그가 장사들을 불러들여 무슨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는데, 평시에는 인사도 변변히 없이 지내던 내 집을 무슨 일로 왔을고.’

이런 생각을 하며 나갔다. 그때 수양대군은 대문을 들어서서 중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사들에게 김종서가 나오면 불문곡직하고 달려들어 단번에 때려잡으라 하였다. 그런데 김종서뿐 아니라 역사(力士)로 이름이 있는 그의 아들 김승규도 뒤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곁에 붙어 있는 한 일을 십중팔구 그르친다고 생각된 수양대군은 순간 꾀를 내어 짐짓 자기가 쓰고 있는 사모의 뿔 하나를 얼른 떼어버렸다. 그리고는 김종서를 보고 말했다.

“내 어딜 가다가 사모뿔 하나를 잃어버렸기에, 마침 지나는 길에 좌상댁이 여기라 듣고 좀 빌리고자 들어온 길이외다.”

김종서는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뒤에 선 아들 김승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에 들어가 하나 갖다 드려라.”

그때 중문 안에서 엿듣고 있던 김종서의 소실, 야화는 이 말을 듣자 뛰어들어가서 사모뿔을 가져다가 김승규가 중문 안에 들어서기 전에 주었다. 김승규가 급히 사모뿔을 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한 손을 번쩍 드는 수양대군의 군호에 의하여 양정·유숙 등 두 장사가 불시에 내달아 철퇴로 김종서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너무도 뜻밖의 일에 김승규는 그만 대적해 볼 겨를도 없이 떨어지는 철퇴 아래로 뛰어들어가 그의 부친을 안았다. 그리하여 양정의 철퇴에 먼저 김승규가 쓰러지고 유숙이 내려치는 철퇴가 이어 김종서를 쓰러뜨렸던 것이다. 손쉽게 김종서의 부자를 타도한 수양대군은 말머리를 돌려 곧장 돈의문을 거쳐 대궐로 들어갔다. 이미 궐문이 닫혀 있음을 본 그는 입직승지를 불러 이르기를,

“김종서가 황보인·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고 모반하려 하므로 내 미처 상감께 아뢸 겨를이 없어 종서를 먼저 죽이고, 이제 그 무리들을 마저 잡으려 하니, 이런 연유를 상감께 아뢰고 빨리 궐문을 열게 하라.”

하였다. 이때 당직 중인 승지 최항은 이미 수양대군과 내통이 있었던 터이므로, 임금께 아뢰지도 아니하고 마음대로 궐문을 열어 주었다. 최항의 안내로 궐내에 들어선 수양대군은 내시를 시켜 김종서 사건의 전말을 아뢰게 하고, 왕에게 알현을 청하였다. 고단한 잠 속에서 깨어 일어난 어린 왕은 먼저 수양대군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기가 질렸고, 또 김종서 부자를 때려 죽였다는 말을 듣고,

“작은아버지, 날 살려주셔요!”

하고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수양대군은 서슴지 않고,

“염려 마십시오. 신이 무사하시도록 조처하겠사옵니다.”

하고는, 그의 심복 장사들을 불러들여 중요한 곳마다 배치해 놓고, 왕명이라 하여 호위군사를 풀어 각 대문을 엄중히 파수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이하 여러 신하들을 불렀다. 불시에 명을 받은 제신들은 모두 황황히 궁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둘째 문 안에서는 한명회가 생살부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생부에 오른 사람은 셋째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으나, 살부에 적힌 사람은 첫째 문에서 그의 시종을 떼어버리게 하고, 둘째 문에서 철퇴로 내려쳐 죽이곤 하였다. 그리하여 황보인·이양·조극관이 연달아 살해되었다. 황보인은 불시에 입궐하라는 명을 받고 궐내로 들어갈 때, 종묘 앞을 지나면서 말을 탄 채로 허리를 굽히면서,

“신의 마음을 통촉하옵소서!”

하였다고 하니, 이미 죽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안평대군과 정분은 각각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사약으로 죽였다. 안평대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뒤이어 교동으로 옮겨 죽였으며, 정분은 유배지에서 조상들의 신주를 모조리 불사른 다음 약사발을 받고 죽었다 한다.

안평대군 글씨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좌부대언(左副大言)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시문과 그림 등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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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돌아간 뒤 얼마 안 되어 그의 소실 야화의 응급 구호를 받고 회생하였다. 그것을 치밀한 수양대군이 보낸 사람이 왕명이라 하면서 목을 베었고, 그의 둘째 아들과 어린 손자들도 모두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선 고명받은 여러 재상들을 죽이고 난 수양대군이 역적의 무리를 소멸시켰다고 잔치를 베풀고 논공할 때, 철퇴를 면한 조신들 틈에 좌찬성 허익이 끼어 있었다. 잔치자리에서 정인지·최항·한확 등이 모두 흥겨워 웃고 지껄이는데, 오직 그만은 추연한 안색으로 앉아서 술이고 고기를 통 먹지 않고 있다가, 이야기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효수하자는 의논에 이르자, 핏대를 세우고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분네들이 무슨 죄가 있소. 나는 그분들의 무죄함을 알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이 대노하여,

“네 술과 고기를 먹지 않더니 과연 딴 뜻이 있었구나! 죽고 싶어 그러느냐?”

하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허익은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조정 대신들이 모두 죽는데, 허익이 살았음은 뜻밖이올시다. 어찌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까.”

수양대군은 불 같은 노여움을 억제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재주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고 거제도로 정배보냈다. 그런데 나중에 이계전의 주청으로 그 역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후일 사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수양대군은 이렇게 뇌까렸다고 한다.

“허익이 살았던들 육신이 칠신으로 될 뻔 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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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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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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