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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보위에 오르기까지

인조반정

仁祖反正

광해군 10년(1618)에 있었던 인목대비 서궁유폐사건은 지금껏 대북세력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들에게 좋은 구실을 주어, 서인 이귀(李貴)·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괄(李适) 등은 마침내 이것을 문제삼아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을 영립(迎立)하니, 이것이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능양군은 정원군의 맏아들이다. 그의 부친 정원군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저경궁 김씨의 소생이었다. 그는 왕자로 있었을 뿐, 인조의 등극 이전에 작고하였는데 인조가 반정을 이룬 다음 그의 부친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였다.

1623년 3월 12일 밤, 오랫동안 물샐 틈 없는 준비를 해오던 반정의 군사들은 드디어 일어났다. 이때 능양군은 친히 여러 공신들과 함께 연서역으로 나아가 이서(李曙)가 거느리고 오는 6천 명의 군사를 맞았다. 그리고는 즉시 장사 이기축(李起築)으로 하여금 창의문을 부수도록 하여 도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창덕궁에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지키고 있다가 반정의 군사가 당도하자 그와 합류하였다.

세검정

《궁궐지》에 따르면 인조반정의 공신들이 이곳에 모여서 거사를 모의하고, 칼을 씻으면서 결의를 다진 후 부터 세검정이라 불렀다 한다. 정자가 있는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가 되기 때문에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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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립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박승종과는 사돈간이었다. 더구나 그가 궁궐의 수비를 맡고 있었으므로 반정의 성공에는 대단히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귀 등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한번은 그 사실을 박승종이 알아차린 적이 있었다. 이흥립의 딸이 박승종의 둘째 며느리가 되어 서로 사돈 사이였지만 박승종에게는 그런 관계가 문제가 아니었다. 박승종은 즉시 광해군에게 사실을 아뢰고 이흥립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김상궁의 말만 믿고 따르는 광해군은 박승종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흥립은 사돈 박승종을 찾아가 누누이 변명하였다. 그런데도 박승종은 끝까지 듣지 않고 장차 직권으로 이흥립을 잡으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마침 밖에 나갔던 박승종의 둘째 아들 즉 이흥립의 사위가 들어왔다. 이흥립은 그를 보자 와락 달려들어 사위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보게 사위, 영상 대감께서 내가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시는구먼. 아 글쎄, 억울한 일도 분수가 있지. 자네가 좀 해명해 드리게나.”

그러고는 통곡을 하니, 박승종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자기 부친에게 놓아주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이흥립은 위태로운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능양군 또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능양군은 이흥립에게 명하여 종묘와 대비전이 있는 서궁을 수비케 한 다음 금호문 밖에 당도하니, 수문장 박효립(朴孝立)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장졸들은 무난히 궁내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공사에 쓰려고 쌓아둔 나뭇더미 위에다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길, 그것은 반정에 성공하였다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들은 대사를 위하여 칼을 빼어들고 집을 나올 때 그들 가족에게 만약 화광이 오르거든 성공한 줄 알고, 그렇지 않거든 실패한 줄 알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능양군은 돈화문 안에 등상(牀 : 나무로 만든 걸상)을 놓고 앉아 궐내 각 직소의 관원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병조판서 이하 여러 관원들이 모두 달려 나와서 절하고 엎드렸다. 이때 반정군이 새로 호응하는 군사 수천 명과 함께 물밀듯이 정청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 광해군의 좌우에 있던 시신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술에 취하여 몽롱히 잠들려 하던 광해군만이,

“이 웬일이냐?”

하고 물었다.

“큰일났습니다. 큰 변이 일어났습니다.”

다급해진 목소리로 한 내시가 아뢰었다. 광해군은 그만 허겁지겁 일어나서 대궐 담을 뛰어넘어 도망쳐버렸다. 반정군이 밤새도록 그를 찾다 못하여 날이 새자 그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능양군은 궐내를 떠나지 못하고, 그 대신 승지 이덕형이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모시러 갔다. 그러나 대비는 능양군이 친히 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이덕형을 도로 보내었다. 이때 이귀가 능양군에게 말한다.

“일이 광명정대한데 별다른 염려가 어찌 있겠습니까. 또한 주상이 몸소 가서 청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시켜 맞이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니 군사는 창덕궁에다 머물고 주장이 친히 서궁에 문안드리는 것만 같지 못하오.”

그러자 능양군은 이귀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히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비전 앞에 나아갔다. 대비는 그제야 좌우를 명하여 선조의 허위(虛位)를 배설하고 능양군과 제신들을 맞아들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뵈온 다음 어보(御寶)를 바치니 대비는 어보를 받아든 채 감개무량한 듯, 지난날 겪어온 고초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신하들은 초조하여 아뢰었다.

“처분할 일이 많사오니 속히 환궁해야 되겠습니다.”

그제야 대비는 이야기를 그치고 어보를 받들어 능양군에게 전하였다.

“위로 선왕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 마음을 편안케 하여 일국이 화합하도록 하라.”

능양군이 세 번 사양하다 받으니 신하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등극한 이가 인조이다. 그는 대비를 모시고 즉시 창덕궁으로 들어가 허물어진 기강과 국정을 바로잡고 팔도에 고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도케 하였다.

한편 광해군은 대궐 담을 뛰어 넘어 자수궁으로 도망가다가 정몽필을 만났다. 정몽필이 광해군에게 말을 주자, 광해군은 그간 자기가 총애하던 안국신의 집으로 갔다. 이에 안국신은 광해군에게 상중에 입던 흰 개가죽 남바위를 쓰게 하고 생포로 지은 철릭과 삼띄, 짚신 차림을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의원인 정남수가 알고 대궐에 알리었다. 이에 대궐에서는 도총부 군사를 보내 그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대비는 광해군이 잡혀들어옴을 보자 뜰아래 무릎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36가지 극악대죄를 들어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말끝을 맺었다.

“이러하니 너는 마땅히 춘추의 대의 아래 중벌을 받아야 한다.”

즉 죽어야 한다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조와 제신들이 극형을 베푼다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하며 살려주기를 간청하였으므로 대비도 노여움을 낮추어 그의 처리를 인조에게 일임하였다. 이에 인조는 광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다시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때도 대비는 광해군과 그의 처첩들을 따로 두라고 하였으나, 인조가 함께 있게 하고 노비도 몇 명 주어 의식거처를 어렵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아들은 땅을 파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 도망치려다가 붙들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부인 유씨는 며칠을 굶다가 죽어버렸고, 그의 첩도 자결하여 죽었으므로 광해군은 부끄러움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들어 앓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 대북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 등은 그들이 낮에 올린 정청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느라고 궐문 밖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체하고 밤에 되어서 별안간 자하문 쪽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장안이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아! 모반을 꾸민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그들은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이윽고 군교에게 붙들려 처형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이룩한 다음, 승지 이덕회를 제주도로 보내어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를 모셔왔으며, 죄없이 귀양간 사람들을 모두 풀어서 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폐가 되는 일은 모조리 고치고, 축문을 지어 우주 제신에게 고하였으며 고문(告文)을 팔도에 반포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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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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