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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광해군

실리외교를 지향한 대외정책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둘씩 제거해가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주력하였다. 아울러 그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 동안 조선의 사대국가이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 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특히 건주위 여진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동향은 종전과는 달랐다. 즉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가의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광해군 9년(1617)에는 요동의 무순과 청하 지역을 경략하였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광해군 10년(1618) 명나라는 조선에 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앞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서둘러서 파병해야만 하였다. 당시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의 요청에 신속하게 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단은 시세를 관망하고자 훈련도 부족한 병사를 모아 보낸다면 강을 건너기도 전에 변심하여 난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지연하였다.

그 사이 명나라의 사정은 더욱 급박해졌다. 그리하여 또 군사의 규모를 처음보다 많이 줄여 요청하였다. 비록 파병을 원하지 않았던 광해군이라고 하여도 이제 더 이상 발뺌한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 조선을 도운 것을 상기해본다면 외교적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7월 참판 강홍립을 5도도원수로 삼고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8월에 하직하도록 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렸다.

“우리는 대의명분상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고, 우리의 힘은 약하니 후금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

광해군의 밀지를 받은 강홍립은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광해군 11년(1619) 2월 결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강홍립은 몰래 통사(通事) 김언춘을 후금진영에 보내 뜻을 전달하였다.

“우리나라는 마지못해서 군사를 보냈다.”

3월에 심하(深河)에 도착, 결전을 치렀다. 그러나 결과는 대패였다. 그러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오랑캐 진영과 협상을 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강홍립의 항복은 조선 조정에 많은 반향을 불러왔다. 평안감사 박엽의 경우는 장계를 올렸다.

“도원수 이하가 적에게 항복하여 신하의 절개를 잃었으므로 각각 그 가속(家屬)을 모아다가 도내에 나누어 가두고, 조정에서 처치하기를 기다리고 있사오며, 강홍립의 서자 숙은 삭주로 옮겨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에 이들을 즉시 모두 돌려보내도록 조치하였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일행은 이후 광해군과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알려주었다. 강홍립의 항복 이후 시간이 지난 후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국서에서 누르하치는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광해군 11년(1619)에는 강홍립 등 약간 명을 제외한 전쟁 포로들을 돌려보내주는 성의를 보였다. 강홍립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의 향도로 차출되어 조선에 들어와서는 강화도에서 인조를 알현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강홍립 등이 후금과 화의를 맺을 즈음 좌영장으로 출전하였던 김응하는 고군분투하여 명나라 군대의 편에서 서서 후금과 대적하였다. 그리하여 적장 수십 명과 적병 5천여 명을 쓰러뜨렸다. 그런데 그가 한참 용전분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비바람이 불어와 모래와 티끌이 마구 날아들어와서 활을 쏠 수가 없어 크게 패하게 되자, 누르하치의 군사들이 맹렬히 공격해 들어오면서 부하들이 하나둘씩 흩어져 마지막에는 김응하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활을 들어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칼을 빼어들고 닥치는 대로 무찔러 나갔다.

그러나 칼마저 부러지자 하는 수 없이 부러진 칼자루만 들고 버드나무 아래 지쳐 쓰러졌다. 무지한 오랑캐 군사들도 그의 눈부신 용전에 감복하여 그의 시체를 거두어 고이 장사지내 주고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뒤에 조정에서는 김응하 장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의 묘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과 그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묘소. 광해군은 초기에는 빈민구제와 국방에 주력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1623년 3월 광해군으로 강등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폐비 유씨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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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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