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왕조사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사랑 사랑 내 사랑
술과 어리 내 사랑
주야 장천 못올 님
어화 어리 내 사랑아
이것은 미치광이 세자라고 불리던 양녕대군이 지어 부르던 노래다. 어리(於里)란 당시 미색으로 이름난 여인인데, 남의 집 소실로 있었던 것을 세자 양녕이 빼앗아 놓고 밤낮으로 그녀를 얼르면서 갖은 추잡한 짓을 다하였다. 원래 양녕은 태종의 맏아들로 세자로 책봉되어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의 별칭)에서 거처하였다. 그는 왕자로서는 전고에 없던 재주꾼으로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태종이 경회루의 현판을 보고 그 웅건한 필치에 놀라 아들 양녕의 필법을 무수히 칭찬했다는 이야기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녕은 세자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알고 나서는 철저하게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안 되어 태종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갔을 때였다. 그는 문 밖에서 다음과 같은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들었다.
“참 아쉬운 일이야.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을……!”
부왕 태종은 긴 한숨까지 내쉰다. 그러자 모후도,
“뉘 아니래요, 충녕이 맏이였어야 할 것인데……!”
하고 그도 한숨을 쉬었다. 이 순간 세자 양녕의 머릿속에는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어두운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삼촌들과의 자리다툼이라는 골육상잔의 참극이었던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세자의 자리를 셋째 아우 충녕에게 내어줄 수 있을까……?”
불시에 이런 생각이 양녕의 머리에 떠오르자, 그는 문안드릴 것도 잊고 자기의 처소인 동궁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궁리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는,
“에라, 모르겠다. 발광할 수 없으면 발광한 척이라도 해보자.”
이렇게 결심하였다. 어질고 덕이 있고 효심과 우애가 지극했던 양녕은, 부왕 태종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자기보다 월등한 셋째 아우 충녕대군에게 깨끗이 자리를 양보하려 한 것이다. 그로부터 양녕은 갑자기 돌변해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리고 간혹 조정의 하례에 참여할 일이 있어도,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가 일쑤였다. 그는 되도록 부왕과 모후를 뵈옵지 않으려고 회피하였던 것이다.
“어떻게든지 공론에 따라 폐세자하였을 뿐, 까닭없이 폐세자한 것이 아니다.”
이런 소문을 일으켜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이후 세자의 광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춘방별감을 대동하고 궁궐을 월장하여 대궐 밖 출입을 하면서 기생들을 상대하는가 하면, 남의 집 반반한 소실까지 빼앗았다. 그가 끔찍이 사랑하던 어리도 이렇게 하여 빼앗은 여인이었다.
어느 날, 태종이 무예를 익히려 군사를 이끌고 평강으로 거둥하였을 때를 세자 양녕은 기회로 생각하고 측근 몇을 데리고 시흥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는 아름다운 기생들을 불러 산 속에서 사냥한 고기와 술을 받아다 질탕하게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리고는 돌아올 때 악공들을 불러 풍악을 울리게 하고 종로 한복판으로 들어서서 세자 자신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다녔다. 이리하여 종로 일경에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날 밤 늦게 춘방으로 돌아온 세자 양녕에게 어떤 별감이 수작을 걸었다.
“동궁마마께 아뢰나이다.”
“이놈아, 무얼 아뢴다는 거냐? 어서 말이나 해봐라.”
“그 왜 지중추부사 곽정의 소실에 어리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어리가 어떻다는 말이냐?”
“마마께서 아직 모르시나이까?”
“무얼 모른다는 거냐?”
“그 어리가……”
“어리가 어떻다더냐? 곱다든, 밉다든?”
“말씀 마시옵소서, 십만 장안에 짝이 없는 미희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 정말이냐?”
“음, 고것을 이 밤으로 낚아들일 수 없겠느냐?”
“업어 오라시면 소인이 업어 오겠사옵니다.”
“얘, 어디 그래 봐라.”
춘방별감은 이리하여 그 밤으로 곽정의 소실 어리를 납치해왔다. 처음에는 싫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동궁으로 붙들어 오자, 어리는 도리어 갖은 아양과 애교를 부리어 세자의 마음을 쉽사리 사로잡았다.
“야, 고것 참 미색이로구나. 너와 내가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고. 이리 온, 내 무릎 위에 앉아라.”
“옛다, 모르겠다. 제왕은 무엇이며 세자란 무엇이냐. 어리 하나만 있으면 나는 만사태평이다.”
양녕은 어리와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그 아름다운 미색에 도취되어 버렸다. 그 뒤 이 소문은 궁중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진노하여, 그 춘방별감을 곤장 쳐서 공주 관노로 내쫓고, 어리를 동궁으로 들이는 데 조력한 사람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그리고 세자도 이 통에 송도로 추방되었다가 며칠 만에야 다시 불려왔다. 어리는 의금부 부진무 이효인을 시켜 춘방에서 멀리 내쫓게 하였다. 이러한 소동이 있은 뒤, 그렇지 않아도 물의가 분분하던 군신들간에,
“폐우입현(廢愚立賢 :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어진이를 세우라는 말로 여기서는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을 세자로 세우라는 뜻) 하시옵소서.”
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묘당에서는 드디어 폐세자의 논의가 대두되었다. 태종도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황희는 이를 반대하였다.
“폐장입유(廢長立幼 :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되옴직하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
사실 황희는 사람을 알아보는 분별력이 남달라서, 세자 양녕이 얼마나 너그럽고 인자한 성군으로서의 자질인가를, 그리고 그가 거짓 미친 체하는 그 심정을 잘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 태종과 그 밖의 신하들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희를 지탄하였다. 황희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마침내 강등되어 귀양갔고, 태종은 제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양녕이 생각했던 것처럼 마침내 폐세자를 결행하였다.
“세자가 학업에 힘쓰지 않고 음탕한 소리를 하며 계집에게 빠지기만 하므로, 부득이 폐하노라.”
이 해 6월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운 다음, 8월에는 태종이 왕위를 충녕 세자에게 전수하고 자신은 상왕이 되었다. 양녕대군이 동궁으로부터 쫓겨날 무렵, 그의 아우인 둘째 효령대군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형님이 폐세자되면 세자 자리는 차례대로 당연히 내게 돌아올 것인데…….”
하고 더욱 학행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 양녕이 찾아와서 효령이 읽는 책을 덮어 팽개치며,
“이놈아, 공부는 뭘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충녕이야, 충녕! 알았어? 공연히…….”
하고 농지거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농담 속에 뼈가 들어있음을 효령은 알아차렸다. 그도 충녕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제 형님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수긍이 되었다. 그는 그만 책을 덮고 그 길로 양주 회암사로 들어가 삭발하고 승려가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는 중이 된 후 세상사를 깨끗이 잊고 오직 염불삼매경에 빠졌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