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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원경왕후 가문의 비애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시책들을 추진하였다. 공신이나 재상들이 거느리던 사병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전국의 지방제도인 8도체제를 정비하여 국가체제를 다져나갔다. 그러면서 태종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씩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에 가시가 되었던 인물은 이거이(李居易)였다.
이거이는 태조 때 평안도병마도절제사·참지문하부사·참찬문하부사·판한성부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던 인물로서, 태종 즉위에도 공이 있어 좌명공신에도 책봉된 인물이었다. 더욱 그의 아들들은 왕실과 혼인관계가 있어, 이저는 태조의 장녀인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하였고, 또 다른 아들 이백강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한 사이였다.
그런 그가 정종 때 계림부윤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던 적이 있었다.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시행했던 사병 혁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정종 재위 당시 세자로 있던 태종은 공신이나 재상들의 군권을 모두 삼군부로 통합하면서 이들의 사병을 혁파하려고 하였다. 대부분이 태종의 명령을 따랐으나, 이거이 부자들만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이 부자는 당시 가장 많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던 인물로서 태종으로서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이무 등이
“거이 부자가 병권을 내놓기를 아깝게 여기오니, 뜻을 헤아릴 수 없고, 또 신 등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한덩어리 고기’라 하니, 일찍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세자였던 태종은 마침내 이거이를 계림부윤으로, 이저를 완산부윤으로 좌천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거이 부자는 당시 중앙으로 화려한 복귀를 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좌명공신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에게 이거이 부자는 어떠한 형태로든 요주의 인물로서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그 결과 태종 4년(1404)에 결국 반역죄로 몰려 이거이 부자는 서인(庶人)으로 신분이 강등되면서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당시 태종은 종친인 이화·이천우 등을 비밀리에 불러 말하기를,
“신사년에 조영무가 나에게 고하기를, 신이 이거이의 집에 가니, 이거이가 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부귀한 것이 이미 지극하나, 시종 보존하기는 예로부터 어려우니, 마땅히 일찍이 도모해야 한다. 상왕(上王 : 정종)은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금상(今上 : 태종)은 아들이 많지만, 어찌 다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겠는가? 마땅히 이를 베어 없애고 상왕을 섬기는 것이 가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조영무에게 경계하여 누설하지 말도록 한 지 이미 4년이 지났다. 이거이도 이미 늙었고, 조영무도 또한 곧 늙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유고(有故)하면, 이 말은 변별(辨別)하기가 어렵다.”
하여 이거이 부자를 조사할 뜻을 비쳤다. 이어 태종은 비밀리에 이거이와 조영무를 대질하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이화 등 조정 관리 35명이 대궐 앞으로 나와서 이거이의 죄를 밝히도록 요청하면서 이 일은 세상에 알려졌다. 어찌보면 태종이 의도하였는지도 모른다.
일이 이렇게 확산되면서 결국 공개적으로 조영무와 이거이의 대질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거이는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였지만 이미 이를 번복하기는 늦었다. 그리하여 이거이 부자는 처음에 진주로 내쳐졌다가 얼마 후 대간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으로 강등되면서 유배길에 올랐다.
이거이 부자들이 제거된 후 태종의 공격 화살은 원경왕후 집안으로 돌아갔다. 원경왕후 민씨를 비롯해 그의 형제들은 따지고 보면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공이 큰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후궁에 둘러싸여 원경왕후를 멀리 하자 점차 둘 사이는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차에 태종은 재위 6년(1406) 세자에게 왕위를 선위하겠다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태종의 선위 표명으로 조정 안이 어수선하던 즈음, 이화를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민무구와 동생 민무휼이 세자를 끼고 돌면서 태종의 선위 표명을 내심 반겼다고 하며 죄상을 고하였다.
“지난해에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輿望)을 따라 복위(復位)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 신하와 백성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반역죄에 해당되었다. 이화 등의 주장이 있은 후 조정에는 민무구 등을 처형하라는 목소리가 연일 쇄도하였다. 민무구의 처형 주장에 대해 처음 태종은 왕가의 인척으로서 공이 있기에 처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어찌보면 태종이 의도했을지도 모를 일을 신하의 입을 통해서 발설하고, 이들의 처벌이 조정의 공공연한 목소리로 나오면서 태종도 어쩔 수 없었다. 태종 9년(1409)은 왕명으로 민무구를 유배보냈으며, 결국 자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무구 등이 자진한 뒤에 원경왕후의 나머지 동생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왕후의 병환이 있을 때 대궐에 들어왔다가,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이 없고 세자인 양녕대군 혼자 있을 때,
“우리 형 무구와 무질이 어찌 모반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세자께서는 우리 집에서 자라셨으니, 세자의 은덕을 입기를 바랍니다.”
하여 자신들의 집안을 보호해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자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한다.
“너의 가문이 좋지 못하다.”
이렇게 은밀하게 한 말이 나중에 밖으로 퍼져 결국 민무휼 등도 처음에는 유배를 갔다가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참으로 비정한 권력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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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원경왕후 가문의 비애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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