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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천주교에 대한 탄압
신유박해
辛酉迫害정조가 승하하면서 11살의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로, 정조가 왕위에 재위할 때 그의 집안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하여 풍비박산이 났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차로 정조 16년(1792) 영남 남인들이 집단적인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였을 때 이에 동조한 서유린을 비롯해 사도세자 추숭에 관련된다고 하여 김이익·김이재·이재학·박제가 등이 유배되었다. 또 홍국영·심이지·정민시 등이 추탈당하였고, 이조원이나 심기태 등은 삭거사판의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친정조 계열(이들은 흔히 시파라고 한다) 인물들을 대거 숙청한 후인 순조 1년(1801) 정순왕후는 정조 치세에서 보호받았던 남인들이 상당수 관여하고 있던 천주교로 화살을 돌렸다. 정순왕후는 겉으로는 천주교가 인륜을 저버렸다고 하여, 감사와 수령에게 이들을 철저하게 색출하도록 지시하였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서학(西學)이라 하여 서양문물이 수입되면서 함께 전래된 천주교는 정조 8년(1784)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후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1785년 천주교도들의 적발에 있어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였으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외국인 신부 주문모를 영입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정조 18년(1794) 천주교도들이 교당에 모여 있었는데, 누군가 말하였다.
“이제 우리도 외국인 신부를 모셔 와서 포교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부분이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지황이라는 사람을 북경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지황은 서양인 양동재를 소개받았으며, 그로부터 북경 천주당에 머물고 있던 주문모 신부를 소개받았다. 지황은 주문모 신부를 만나 자초지종을 소개하고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때마침 동지사 일행들이 북경에 와 있을 때였다. 지황은 꾀를 내어 동지사 일행에 합류해서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면서 천주교가 이전보다 급속하게 확산되어, 일반 양반이나 평민들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에서 활동하던 남인들에게 전파되어 이승훈·이벽·권철신·이가환·정약용 등은 서학과 천주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조가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며, 특히 이승훈·정약용 등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더구나 정조에 대해서 원한을 갖고 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하나둘씩 시파계열 인사들이 제거되자 이들은 긴장하였다. 결국 순조 1년(1801) 정순왕후는 하교를 내려 천주교도의 대대적인 색출에 나섰다.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은 사학(邪學)으로 규정한 천주교에 대한 탄압임과 동시에 남인으로서 천주교와 관련 있는 친정조계열 인사의 제거작업이었던 것이다.
정순왕후의 하교가 떨어지자 각지에서 천주교 핵심들이 대거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권철신·이가환·정약용·정약전·정약종·이승훈·이기양 등 지도급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이들은 서울에 압송되어 심한 혹형으로 다스려졌다. 이가환·권철신 같은 인물은 심한 국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였고, 정약용과 정약전 등은 각각 장기현과 신지도에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천주교도에 대한 국문이 진행되던 중인 3월 15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했다는 사실을 영부사 이병모는 보고하였다.
“이달 12일에 사학(邪學)으로서 금오(金吾)에 자수한 자가 있었는데, 먼저 포청(捕廳)에서 반문(盤問)하였더니, 바로 국초(鞫招)에 나왔던 사학의 괴수 주문모(周文謨)였습니다. 주문모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므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많이 있어서 문자(文字)를 써서 공초(供招 :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를 바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순조는,
“무엇 때문에 자수하였다고 하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지금 수탐하라는 명이 있었고, 그의 당류가 거의 모두 잡혀갔으므로 발붙이기가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또 언어가 익숙하지 못하고 거동이 불편하였으며, 만약 붙잡히게 되면 그 또한 용서받기 어려운 줄 알았기 때문에 자수하여 요행히 만에 하나라도 면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순조는,
“용모가 어떻던가?”
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에 이병모는,
“신도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듣건대 그 용모는 구레나룻이 자못 길고, 말쑥한 얼굴이 온화하고 관대해 보여 마치 문사(文士) 같은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하며 계속해서 그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기존의 천주교도에 대한 수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를 국문하는 과정에서 김건순과 이희영이라는 이름이 나왔는데, 김건순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로 유명한 안동 김씨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양행의 손자였다. 그런데 김건순은 재력이 있었는데, 하루는 주문모 신부를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장차 거함(巨艦)을 건조하고 갑병(甲兵)을 양성해서 대해(大海) 가운데 도성(都城)이나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곳에 들어가, 곧바로 피국을 공격해서 옛날의 수치를 씻겠다.”
옛날의 수치란 곧 인조대 병자호란 당시의 치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문모가 답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전수할 만한 정술(正術)이 있으니, 우선 너의 경영하는 것을 버리고 나의 학(學)을 따르는 것이 옳다.”
주문모는 또한 국문 과정에서 강화도에 출입하면서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은언군 인의 처와 며느리가 거처하는 곳을 왕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곧바로 사사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반천주교 세력들은 주문모 신부가 나라에 원망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모반을 꿈꾸는 것을 몰아부쳤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천주교도들은 서양의 군함을 불러들이려고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황사영의 백서(帛書)가 발각되면서 더욱 곤경에 처하였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피해 제천의 배론에 피신해서 생활하던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가 구속되는 등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조정에서 행해지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 방안을 비단에 적어 비밀리에 중국 북경에 보내려고 하였다. 다음은 황사영이 제시한 방안 세 가지이다.
• 청나라 황제가 황지(皇旨)를 조선에 내려 조선에서 서양인과의 교제를 허용하도록 할 것
• 안주(安州)를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 서양에 통하여 큰 선박 수백 척에 정병(精兵) 5, 6만 명을 꾸며 보내고 대포 등 병기를 많이 싣고 와서 조선을 깜짝 놀라게 하여 천주교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할 것
백서가 발각되면서 황사영은 즉각 처형되었으며, 이후 천주교도들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천주교 탄압이 정당하였다고 종묘에 고하는 한편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반포하였으며, 청나라에도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1801년에 진행된 일련의 천주교 탄압을 천주교 측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정통 주자학을 고수하는 세력은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하는데, 희생자만도 대략 5백 명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시파계열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제거작업이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조가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여러 정책도 파기되거나 중단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장용영 혁파로서, 장용영은 정조가 친위군대로 양성한 군대였는데,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장용영의 군사비용을 빼내어 호조의 부족한 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으며 순조 2년(1802) 1월 결국 혁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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