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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서인의 집권
경신환국
경신사화(庚申士禍), 庚申換局남인이 탁남과 청남으로 나뉘어져 대립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던 숙종 5년(1679) 6월 영의정 허적이 허목의 상소로 인해 성 밖으로 나간 일이 있었다. 숙종은 이를 두고 당시 조정의 폐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경고하였다.
“이처럼 국가가 위태한 때일수록 모든 신하가 사정을 버리고 공무를 따라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인데, 요사이 조정에 화협을 하는 기풍이 조금도 없구나. 한쪽을 너무 미워하다가 지난날 붕당의 피해를 보게 되었는데, 또 한쪽이 둘로 갈라져 오직 붕당을 두둔하는 것만 능사로 여기고 나라 일은 도외로 제쳐두어서, 마침내 정승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갈팡질팡 서울을 떠나게 하였으니, 내 실로 통탄스럽다. 만약 준엄한 징계를 가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라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겠다. 이제부터 다시 지난 버릇을 밟아서 서로 대립하여 이기기에만 힘쓰고 사사로이 붕당을 두둔하는 자가 있으면 중율(重律)로써 다스려 용서하지 않으리라.”
숙종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남인 내의 내부 대립은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1680년 3월 남인에서 서인으로 집권세력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의 계기는 1680년 3월 28일 탁남의 영수였던 허적이 그의 조부 허잠에게 조정에서 시호가 내려진 것을 기념하는 축하잔치인 연시연(延諡宴)이었다. 당시 허적의 위세 때문인지 잔칫날 허적의 집에는 내로라하는 조정 관리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다만 이때 서인의 핵심세력이었던 김석주는 참석하지 않았다. 허적은 김석주와 함께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초청하기 위해 서자 허견을 여러 차례 보내 이들을 초청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도성에는 허견이 무사들을 모아놓고 서인을 제거하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김석주도 이런 위험을 감지했는지, 허견이 여러 차례 와서 참석을 권하였으나, 자신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고, 대신 김만기에게,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잔치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요.”
하며 참석을 권유하여, 김만기만 참석하였다. 잔치에 참석하였던 김만기도 늦게 가서는 독살을 우려해, 자기 잔으로 술을 먹지 않고 남의 잔을 빼앗아 마셨으며 나물만 먹었다. 허적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중에 비가 내렸다. 그러자 숙종은 대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가 비로 인해 잘 진행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옆의 내시에게 궁궐에서 사용하는 장막과 차일을 찾아주라고 했는데, 내시가 답변하였다.
“허적이 물건을 찾아서 장막과 궁중 잔치에 설치하는 판자와 새끼 등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숙종은 내시의 대답을 듣고는 혹시 하는 생각을 하며, 내시에게 거지 옷으로 변장하고 직접 허적의 집에 가서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하였다. 숙종은 내심 허적을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궐 내에서 쓰는 장막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은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거늘……’
허적의 집에 다녀온 내시의 대답은 사실 그대로였으며, 뿐만 아니라 허적의 당파가 많아 기세가 당당하더라는 말도 있었다. 남인들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 가운데서 탁남과 청남으로 나누어 당쟁을 일삼는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숙종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이들을 제거하고자 마음먹었다.
숙종은 먼저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혁연·김만기·신여철을 불러들이고는, 김만기에게 훈련대장직을, 그리고 남인 유혁연이 맡고 있던 총융사를 신여철에게 맡도록 하였다. 다음 날에는 철원에서 귀양생활을 하고 있던 김수항을 불러들였다. 서서히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어 정재숭·조지겸·유상운·남구만 등이 차례차례 관직에 제수되어 조정으로 들어왔다. 이를 이른바 ‘경신환국’이라 한다.
남인이 정계에서 대거 축출되는 와중에 남인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고변서 한 장이 숙종에게 제출되었다. 정원로와 강만철의 고변으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뒤에 복선군이 신 정원로의 집에 이르렀고 허견이 또 이르렀으며, 지난 여름에 허견이 글을 보내어 복선군의 집에 오게 하고, 또 청지기[廳直] 점동(點同)이라는 자로 하여금 그 집을 가리켜 주게 하며 신의 종[奴]으로 하여금 편지를 바치게 하였는데, 대개 그 글이 바로 신의 집에 모이기를 기약한 것입니다. 복선군의 답서를 허견에게 전해 보내고 신의 집에 모였는데, 허견이 말하기를, “주상의 춘추(春秋)가 젊으신데 몸이 자주 편찮으시고 또 세자[儲位]가 없으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감(大監)이 임금 자리를 면하려해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니, 복선군이 대답이 없었습니다. 허견이 말하기를, “이제 나라가 장차 망하려는데 반드시 잘 하여야 할 것이며, 당론(黨論)을 마땅히 타파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이 듣고는 송연(悚然)하여 곧 와서 고하려고 하였으나, 주상께서 영상(領相)을 신임하고 존중하시므로 무고(誣告)했다는 죄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제까지 주저하다가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이를 자세히 아룁니다.
즉 허적의 서자 허견이 복선군을 끼고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정원로 등의 고변서가 제출되자, 국왕은 즉시 도성의 경비를 강화시키는 한편 즉각 국청(鞫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국청이 설치되어 고변서에 이름이 등장한 허견과 복선군 등이 결국 이를 시인하게 되고, 허견은 군기시 앞 길에서, 복선군은 당고개에서 교살형에 처해졌다. 허적은 연좌율이 적용되었으나 선왕을 모신 대신이라 하여 사형만은 면하고 삭탈관직되었다. 이후에도 복선군과 연결된 종친을 비롯해 많은 남인들이 처벌되는 등 정가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남인에서 서인으로 집권세력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경신환국과 허견의 옥사는 숙종의 외삼촌인 김석주에 의해서 주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선군을 비롯한 인평대군의 아들들은 일찍부터 남인들과 교제하였는데, 숙종 초 허적이 영의정에 있으면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복선군 등이 허적의 서자 허견을 불러 회유하였다.
“임금께서 만약 불행해지면 너는 나를 다음 왕이 되게 하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병조판서를 시킬 것이다.”
그러자 허견이 복선군 등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때 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병조에서 남아 관직 생활을 하던 김석주가 이런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밀정을 그들에게 보내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탐하게 하였다. 허견과 관련된 고변서를 제출한 정원로 등은 김석주가 보낸 밀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경신환국과 이어서 발생한 이른바 허견의 옥사는 김석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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