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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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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예송에 서인의 1년복설이 결정되면서, 3년설을 주장하였던 남인들 대부분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효종대부터 입조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송시열의 위세는 더욱 높아만 갔다. 이 당시 송시열의 위세에 대해서 《연려실기술》에서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유림의 영수로 당세에 추앙을 받고 있어, 그가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을 선비들이 감히 논란을 하지 못하는 터이었다.

과히 송시열의 위세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송시열의 영향력이 막강하게 작용하던 즈음, 현종 5년(1663)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전해인 1662년 11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에 현종은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화관에 친히 행차하였는데, 그때 수찬으로 재직하던 김만균이 왕의 수행을 기피하고 관직을 사퇴하는 상소를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김만균의 상소 내용은 조모 연산 서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므로 청나라는 자신에게는 원수가 되기에 그들을 맞이하는 행차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승지 서필원이 김만균의 상소를 문제삼아, 그를 심하게 꾸짖는 한편 국왕에게 보고하기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부모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사직을 허가하지 않았던 관행을 들어 이를 국왕에게 들이는 것을 막자고 하였던 것이었다. 이때 서필원은 관료질서의 해이를 우려하였다.

“지금 만약 이 소를 봉입할 경우, 예전부터 이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감히 소장을 진달하지 못하던 자들이 모두 앞으로 잇따라 사면할테니, 온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행공하는 자들이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서필원의 처사가 있은 후 그의 행동에 대해서 왈가왈부 설전이 있었는데, 이때 김시진 같은 이는, 서필원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상소를 들인 승지와 김만균을 죄로 다스리자고 하였다. 김시진은 이번 일로 우의정 홍명하와 대화하는 와중에,

“조정에서 반드시 김만균을 북경(北京)에 파견한 뒤에야 나라의 기강이 확립될 수 있다.”

이런 말까지 하며 김만균의 처사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물론 김시진의 이런 입장은 홍명하가 입단속을 시킴으로써 전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필원을 지지하는 세력이 조정 내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논란이 진행되면서 김만균의 사직은 허가되지 않고 그 상소는 반려되었다. 그러나 김만균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심지어 입직마저도 거부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현종도 이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여, 그를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현종의 이런 조치는 사실 파격적인 것이었다. 원래 대간을 비롯한 언관들의 경우는 역모가 아닌 경우에는 하옥을 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그리하여 남구만은 국왕에게 언관의 예우를 요청하였다.

“근시(近侍)를 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특별한 조치라 하겠는데, 진정 용서하기 어려운 죄만 아니라면 예(禮)로써 진퇴(進退)시켜야 본래 마땅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옥은 중단되고 파직하여 쫓아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처리는 당시 조선사회가 지향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즉 당대 조선사회는 병자호란의 패전 후 자신들이 그렇게 떠받들고 모시던 인조가 오랑캐라고 생각하던 여진족의 왕 앞에 무릎 꿇은 것을 보면서 치욕을 느끼고, 복수하여 이 치욕을 언젠가는 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만큼 청나라는 대다수 사림들의 복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국왕과 조정 일각에서는 하옥까지 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시 사림들의 여론 향배를 좌지우지 하던 송시열로서는 이 문제를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송시열은 장문의 상소를 제출하여 이 문제가 잘못 처리되고 있음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송시열은 상소에서 선왕이 효종 때 자신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국왕의 배려로 청나라에 관한 일이 면제되었다고 상기시키면서 인륜의 회복을 원론적으로 주장하였다.

“대체로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단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니 혹시라도 이를 버리면 인류는 금수(禽獸)의 상태가 되고 중국은 이적(夷狄)으로 전락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어서 주자의 글 가운데 유공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사를 인용하기를,

“유공에게 일찍이 조부의 원수를 갚을 일이 있었는데, 그가 진강(鎭江)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호관계로 이르러 큰 깃발을 배 위에 세우자 유공이 노하여 다른 깃발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에 접반사(接伴使)가 크게 두려워하여 매우 급히 찾았는데, 유공은 말하기를 ‘그 깃발을 나의 고을 경내에서 세우려고 한다면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는 그 경내를 벗어나서야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면서 송나라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공과 같은 사의(私義)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였다. 이후 논의가 진행되면서 이 사실은 유공이 아니라 그의 부친인 유자우임이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결국 송시열의 논의는 때에 따라서는 사의가 우선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송시열이 당시 정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본다면 그의 상소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그러나 서필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긴다면 마땅히 먼저 신하된 도리를 최우선의 가치에 두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이렇게 송시열과 서필원의 상소가 번갈아 가면서 제출되는 가운데 조정은 서필원을 지지하는 측과 송시열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었다. 이는 마치 효종대 한당과 산당의 대립 양상을 다시 보는 듯했다. 서필원은 한당의 입장을, 송시열은 산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조정이 서로 나뉘어서 대립과 갈등을 보이자, 현종도 이 문제에 무관할 수는 없었다. 사실 현종은 처음부터 김만균이나 송시열 등이 제시하는 사의론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이런 회의에는 현종이 즉위 초 제1차 예송에서 송시열 등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회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중재를 자임한 인물이 남구만·홍명하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양 세력을 오가며 중재에 나서 서필원의 파직과 함께 송시열의 주장을 지지했던 세력들이 송시열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고 하며 양자를 모두 비판하였다. 결국 서필원이 자신의 책임을 묻고 스스로 체직을 요청하면서 그간의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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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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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서인의 집권과 분열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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