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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청국의 러시아 정벌과 조총수 파병

효종이 북벌을 위한 군비 증강의 조치들을 정력적으로 취하던 시기인 효종 5년(1654) 2월 청나라에서 한거원(韓巨源)이라는 자를 조선으로 보냈다. 한거원은 궁궐로 들어가 효종을 인견하며 청나라 예부에서 보낸 문서를 내놓았다. 그 문서에는 뜻밖의 요구가 있었다.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백 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昻邦章)의 통솔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초 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

즉 조선에 나선 정벌을 위한 조총수 파견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선이란 당시 청나라에서 러시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 점차 시베리아로 진출하면서 흑룡강 일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흑룡강 일대는 청나라에서 자신들의 선조가 일어난 곳이라 하여 매우 성역화하던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 러시아가 진출하였다는 것은 청나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나라 예부에서 보낸 자문을 통해 비로소 나선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효종은 자문을 읽고난 뒤 한거원과 차를 마시며 물었다.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그러자 한거원이 답하였다.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이제 비로소 나선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효종으로서는 선뜻 파병한다는 것이 어떨지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물론 청나라 요구를 안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효종은 즉위 후 정력적으로 군비 증강을 추진하던 왕이 아닌가. 이 기회에 그 동안 자신이 기른 병사들을 시험해보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 효종은 마음 속으로 파병을 결정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때 한거원이 예부의 자문에 대한 대답을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정태화가 어느 장수를 보내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다. 이에 한거원은

“북도의 변장이나 수령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파병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단지 군사만을 보내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고, 거기에 군량의 조달 등 재정문제가 결부된 것이었다. 한거원이 자리에 물러나자 영의정 정태화는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우리 군사가 강을 건넌 뒤에 저들이 만일 군량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군색한 걱정거리가 있을 터이니, 그 도로를 계산하여 군량을 싸서 보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효종도 이에 동조하고는 병사를 거느리고 갈 장수로 북우후 변급을 임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제1차 나선정벌 원정군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1차 파병군은 변급의 인솔 하에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넜다. 이어 청나라 군사와 연합해서 영고탑으로 향한 후 4월 말경 러시아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우리 측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파병되었던 전원이 귀국하였다. 효종은 내심 무척 흡족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그간 양성했던 군사력을 실제 전장에서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1658년 다시 러시아 정벌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조총수 200여 명과 함께 군량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특히 군량의 지원에 대해서 강조하였는데, 같은 해 3월 청나라에서 이일선을 조선에 보냈다. 조선에 온 이일선은 효종과 인견하는 자리에서,

“대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羅禪)을 토벌하려는데, 군량이 매우 부족합니다. 본국에서도 군병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국에서 다섯 달 치의 군량을 보내 주시오.”

하며 군량의 지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는 적의 형세를 묻는 효종의 질문에 답하여,

“적병은 1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들이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내지(內地)의 곡물을 수송하여 군량을 이어 대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청나라의 군량 확보가 여의치 않음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실제로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측에서 강박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인 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요구에 대해 효종은 돕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초 장수 신유가 조총수 200여 명 등을 데리고 출정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을 지나 흑룡강 일대에 도착한 조선군은 6월 초 러시아 군대와 접전하였다. 그 결과 일부 전력 손실이 있었으나 신유의 작전이 성공하면서 러시아 군대를 퇴각시키며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두 차례의 파병에 많은 인원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파병을 통해 본 군사력 수준을 가늠해 의미있는 일이었다.

대군, 군, 공주, 옹주는 누가 되나?

조선시대에는 같은 왕의 자식이라도 등급에 차이가 있었다.《경국대전》에는 왕비 소생의 아들은 대군(大君), 딸은 공주(公主)라 하였고, 후궁 소생의 아들은 군(君), 딸은 옹주(翁主)라 칭한다고 규정해놓고 있다. 군(君)의 칭호는 왕의 아들 이외에도 왕손이나 공신의 봉작으로서 붙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군·군, 공주·옹주의 명칭은 왕실 내 적서(嫡庶) 차별에서 비롯되었으며, 왕비 소생인가 아니면 후궁의 소생인가에 따라 나뉘었다. 이런 차별은 국왕의 딸과 혼인한 사위에게도 있었다. 같은 ‘위(尉)’라는 칭호가 주어지지만 공주와 혼인한 부마는 처음부터 종1품에 해당하는 ‘위’를 받았고, 옹주와 혼인한 부마에게는 종2품에 해당되는 ‘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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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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