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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민수의 사옥

왕조 최초의 사옥

조선시대는 한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이 즉위해서 선왕의 업적을 정리하는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실록을 편찬할 때는, 전 왕대에 사관을 역임한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기록한 사초(史草)를 실록 편찬을 주관하는 실록청에 납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사초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서 발생한 사건을 흔히 사화(史禍)라고 하였다. 예종대 조선조 최초의 사화(史禍)가 발생하였으니, 바로 민수(閔粹)의 사화였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후 선왕이 세조대의 실록 편찬 작업을 위해 관행대로 사관을 역임한 모든 이들에게 사초를 바치도록 하였다. 민수도 세조대에 사관을 지냈으므로, 이러한 명이 내려지자 역시 사초를 납입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개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실록청 당상이었던 신숙주 등에 대해서 비판한 내용이 있었고 그곳에 민수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수는 자기가 이미 납부한 사초를 빼내서 고치기로 결심했다.

《세조실록》

세조 때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1471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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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봉교 이인석과 첨정 최명손에게 요청해서 사초를 빼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친한 친구인 박사 강치성(康致誠)에게 요청하였다. 강치성도 처음에는 한두 차례 거절하다가, 민수가 워낙 절실하게 말하자 소매 속에 넣어 주었다. 자기의 사초를 받아든 민수는 집으로 돌아가서 바삐 고치느라고 미처 깨끗하게 쓰지 못하고 도로 바치었다. 그런데 검열 양수사와 최철관이 민수의 사초에 글씨를 지우고 새로 고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참의 이영은에게 알렸다. 이영은은 이를 다시 실록청의 여러 당상들에게 말하니, 당상관들이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앞서 원숙강이란 사람은 민수와 같은 사례가 있을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

“사초에 이름 쓰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바른 대로 쓰는 사람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이름을 쓰지 말게 하옵소서.”

하고 이름 쓰는 것을 폐지하자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 국왕은 화를 내고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민수가 사초를 고친 일이 발각되면서, 원숙강도 고쳐 썼다고 하여 민수와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 이윽고 국왕이 친히 민수를 국문하였다. 민수는 국문에 임하면서,

“신이 쓴 것은 모두 대신들의 일입니다. 그 대신들이 모두 실록청에 있으므로 신이 중상 당할까 염려하여 고치려 한 것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신은 외아들이니 목숨이나 잇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이에 왕은 불쌍히 여기고,

“정직하다. 내가 서연에 있을 때부터 민수의 사람된 품을 잘 안다.”

하고는 곤장을 친 뒤에 제주로 보내어 관노로 만들었다. 민수의 사건으로 사초를 내준 강치성과 함께 원숙강도 참형을 받았으며, 처음 사초를 빼내어달라고 청탁을 받았던 최명손과 이인석은 사실을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곤장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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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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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민수의 사옥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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