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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열다섯 살의 꽃다운 나이로 궁에 들어온
정순왕후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 貞純王后오색이 찬란한 비단옷으로 몸을 감은 여러 재상가의 따님들이 황홀하게 치장을 하고 즐비하게 수놓은 방석 위에 앉아서 영조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준비가 다 되었음이 영조께 알려지자 영조는 좌우에 시신들을 거느리고 아름다운 처녀들을 간택하기 시작하였다. 즐비하게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러 처녀 중에 어찌된 일인지 한 처녀만이 앉아 있지 않고 서있는 것이었다. 이상히 생각한 영조는,
“저 처녀는 뉘 집 딸인데 저렇게 서있느냐?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가 물어보아라.”
나인들이 다가가서 서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재촉을 하였다.
“임금께서 친히 간택을 하시는 자리에서 이렇게 서있는 법이 아니오. 좌정하시오.”
이렇게 독촉을 받았으나 그 처녀는 여전히 서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하문을 하였다.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고.”
이렇게 임금의 하문이 있은 연후에야 그 처녀는 나인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을 써 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사오리까?”
나인이 아래의 방석을 내려다보니, 과연 각각 규수들의 아버지 이름을 써 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간택하는 자리에서 누구의 딸인가를 임금이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니 영조가 크게 깨달아,
“그렇겠다. 아무리 방석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이름을 감히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느냐? 뉘 집 규수인지 모르겠으나 과연 영리한지고!”
이렇게 감탄을 하였다. 간택이 진행되고 법도에 따라서 사찬이 내리어 음식상이 들어왔다. 이어서 영조는 규수들의 뜻을 떠보기 위하여 물었다.
“무슨 음식이 가장 맛있느냐?”
이런 하문에 다른 규수들은,
“떡이올시다.”
“국수라고 아뢰오.”
“식혜올시다.”
이렇게 식성대로 아뢰었는데 유독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인 그 소녀만은,
“소금인 줄로 아뢰오.”
하는 뜻밖의 판이한 대답이었다. 이어서 왕은,
“그대들은 무슨 꽃을 제일 좋다고 생각하느냐?”
하니 다른 처녀들은 매화니, 국화니, 모란이니, 연꽃이니 하여 각기 자기네들이 좋아하는 꽃을 말하였으나 오흥부원군의 딸만은,
“사람의 의복을 만드는 면화가 으뜸이로소이다.”
하는 대답이었고, 이어서 영조는,
“세상에 무엇이 제일 깊은고?”
하고 하문하시매,
“물이올시다.”
“꿈이옵니다.”
“사람의 정(情)인가 하나이다.”
이런 별별 소리가 다 나왔으나, 이 물음이 김한구의 딸에 이르자 그녀는,
“사람의 마음인가 하나이다.”
이리하여 영조 35년(1759) 영조는 크게 감동하여 김한구의 딸을 왕후로 삼으니, 그때 영조의 나이 66세였으며, 정순왕후의 나이가 15세였다. 정순왕후는 순조가 즉위할 때까지 생존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해서는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 박해 등에 앞장섰다. 그녀의 이런 정치적 성향은 그의 집안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성향이기도 하였다. 정순왕후의 집안인 경주 김씨 김한구 집안은 대대로 노론의 당색을 띠고 활동하였다. 다만 영조 말년 경 앞서 죽은 사도세자의 부원군 홍봉한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특히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정면에 나서서 세손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면서 벽파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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