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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조선 건국의 여명
위화도회군
威化島回軍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려 조정에서 입지를 다져나갈 즈음, 최영은 고려의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성계는 병권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권신의 횡포와 당파의 알력다툼이 다소 잠잠한 것같이 보였으나, 실상 신구 세력의 충돌과 보수와 개혁의 암투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약 100년 동안 대제국으로 군림하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대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서서히 중국의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말을 보내라, 처녀를 보내라 등등 주문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원래 고려 땅이었다가 몽골군이 침략하여 직할령으로 만들었던 철령위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우왕 14년(1388), 명은 고려에 대하여 철령 이북·이동·이서의 땅은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곳이니, 이를 요동 관할 하에 두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이 요구에 대하여 고려의 국왕과 신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수상이었던 최영은 원래 이인임과 더불어 친원파의 한 사람으로서, 한번은 명의 요구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명의 요구가 이와 같다면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싸움을 함이 옳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서 글을 써서 명나라로 보내어 철령위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철령은 물론 그 이북 공험령까지도 본래 우리나라의 영토 안에 있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소수의 중신회의를 열어 명의 요동 정벌에 대한 가부를 토의하기도 하였다. 회의에 참석하였던 소수의 재상들은 일제히 화친을 주장하였으므로, 최영은 다시 모든 관리들을 모아 철령 이북의 땅을 할양함이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를 토의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에 철령위를 돌려주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에 최영은 왕과 비밀리에 만나서 논의한 후 각 도의 군병을 징발하여 명의 요동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즈음 명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의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요동을 지키던 장수로 하여금 요양으로부터 철령에 이르기까지 칠십 참(站)을 두어 수비를 엄중히 하겠다는 내용을 통보하도록 했다. 우왕은 깊이 탄식하였다.
“군신이 나의 요동 공략의 계책을 듣지 않더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우왕 14년(1388) 봄 3월의 일이다. 드디어 명을 내려 군사를 소집하였다. 징병령이 내려지자 각 도에서는 갈피를 못잡고 어수선하였다. 여러 해 왜구의 침략을 받아 궁핍해진 백성들은 또다시 농사철을 잃게 되자 원성이 자자하였다.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수상 최영은 과감히 자신이 팔도도통사가 되어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에 출진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좌우군 통합 38,800여 명을 이끌고 평양을 떠나게 하였다. 그러자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여 누차 그 불가한 점을 들어 왕에게 간하였으니
“지금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
하고 사리를 따져 간곡히 말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아니하여 부득이 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는 사직하려 하였다. 다섯째 아들 방원(후일의 태종)이 당시 이십 전후였던 이성계에게 조용히 아뢰었다.
“이 일은 아마도 최영이 아버님을 꺼려서 견제하고자 함인가 생각되옵니다. 그러므로 굳이 사면하고자 하시오면 최영이 반드시 아버님이 왕명을 거역한다는 죄목을 씌울 염려가 있습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계시다가 형편을 보아 조처하심이 상책이옵니다.”
이방원의 말을 듣고 이성계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그 이튿날 군사를 이끌고 출발하였다. 그때 우왕은 개성 주둔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싸움을 독려하고자 최영과 함께 그 뒤를 따라 평양으로 내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요동 정벌의 왕명을 받은 이성계는 군대를 지휘하여 우왕 14년(1388) 5월경에 압록강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위화도란 섬에 진주하여 더 진군치 않고 머물러 있었다. 때마침 큰 장마를 만나 군사들이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상소하여 정벌군의 회귀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우왕과 최영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신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좌·우군도통사는 다시 사람을 평양에 보내어 회군의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여전히 이에 대한 허락의 의사가 없었으므로, 이성계는 드디어 회군을 결심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장수들을 향하여,
“만약 상국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와 백성들에게 재앙이 바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들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惡人)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며, 모든 병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찬동하였다. 장수와 군사들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는 즉시 군사를 국내로 향하였다. 모두 이성계를 향하여 한마음으로 복종할 것을 맹서하였다. 이것이 훗날 이성계로 하여금 앞길을 터서, 큰 뜻을 품게 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성계가 군사를 돌렸다는 소식을 접한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성으로 분주히 돌아와서 회군 방어의 준비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초에 평양을 떠날 때 거느리고 나갔던 수천 명의 군사와 수십 명의 조정 신하 대부분이 중도에 뿔뿔이 달아나거나 성 밖의 진중으로 도망쳤다. 결국 우왕과 함께 개경까지 돌아온 신하는 최영 외에 너댓 명뿐이고, 군사는 겨우 1백 명 남짓이었다.
한편 이성계가 장졸을 지휘하여 올라갈 때, 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속히 행군하자고 청하자 이성계는 대답하였다.
“급히 올라가다간 최영의 군사와 부딪치기 쉬우니 그리되면 인명을 상하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회군하는 터에 어찌 그런 충돌을 바라겠는가?”
하고 서서히 올라왔다. 이성계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저마다 다투어 음식과 술을 준비해서 큰길가에 나와 이성계의 덕을 칭송했다. 심지어 동요의 한 구절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생겼다. 목자란 바로 ‘이(李)’ 자를 나눈 것으로 이성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즉 이성계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다. 군인과 민간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당시 백성들의 마음이 이성계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위화도회군의 성공은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반면 이성계가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받게 했던 사건이었다.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설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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