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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사상논쟁이 정치논쟁으로

제1차 예송

기해예송

1659년 5월 북벌을 추진하며 고단한 왕위를 보낸 효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국왕이 승하하면 전례에 따라 일을 진행하며, 이 과정에서 국장 업무를 주관할 빈전도감·국장도감·산릉도감과 같은 임시관청이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왕조의 모든 인민들은 상복을 입고 국왕의 죽음을 애도하게 된다. 이때 상복의 종류는 친소관계에 따라 몇 년간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효종이 승하 후 이 문제가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 경우가 있었다. 이를 제1차 예송이라 하며, 간지를 붙여 기해예송이라고도 한다. 이때 예송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효종이 승하할 당시 왕실의 큰어른으로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있었다. 따라서 조대비는 효종의 생모는 아닐지라도 효종에게는 어머니뻘이 된다. 그런데 효종은 인조의 적장자가 아니라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점이 또 이 시기 상복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효종대왕국휼등록》

효종의 국상 처리 전반을 정리한 책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효종이 승하한 다음 날, 예조에서 국상을 주관하는 왕세자에게 건의하였다.

“자의왕대비(慈懿王大妃)가 대행 대왕을 위하여 입을 복제(服制)가 《오례의》에는 기록되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혹자는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이에 왕세자는 두 찬선(贊善)에게 모든 것을 문의하라고 지시하였다. 두 찬선이란 송시열과 송준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때 송시열 등은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등 대신들이 주장한 ‘시왕(時王)의 제도’에 따라 1년복이 타당하다는 주장에 동조하였다. 여기서 시왕의 제도란 《경국대전》과 《대명률》에 근거한 제도를 말한 것이었다. 이 논의를 왕세자는 받아들여 1년복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남인 측 윤휴는 3년복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이시백을 통해서 정태화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이에 정태화는 윤휴의 주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속내를 드러냈다. 송시열은 정태화의 물음에 답하였다.

“예문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그의 복도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고서 그 아래에 또 4종의 설이 있는데, 서자(庶子)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예문대로 말하자면 차장자 역시 서자인데, 위 아래의 말이 이처럼 서로 모순이 되고 있으며 또 의거해 정정할 만한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도 없어서, 이것은 버리고 저것은 취할 수가 없습니다.”

서자, 즉 장자가 아닌 자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경우에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송시열이 말한 4종의 설이란 적자로서 폐질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正體不得傳重], 서손(庶孫)이 뒤를 이은 경우[傳重非正體], 서자(庶子)가 뒤를 이은 경우[體而不正], 적손이 뒤를 이은 경우[正而不體] 등이다. 4종의 설에 대해서 하나 하나 설명하는 와중에 마지막 두 항목에 이르러 송시열은 정태화에게 말하였다.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昭顯)의 아들은 바로 ‘정이불체’이고 대행 대왕은 ‘체이부정’인 셈입니다.”

이 이야기는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종법상 엄연히 적장자는 소현세자이므로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입장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시까지 살아 있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더구나 효종이 서자이기에 조대비가 3년복을 입으면 안 된다는 것은 효종의 왕위계승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정태화는 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면서, 송시열에게 더 이상의 말을 못하게 막으면서 《경국대전》에 규정된 조항으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왕세자에게 건의하여 1년복제가 결정되었다.

이후 이렇게 결정된 복제로 국상을 진행 중이었는데, 현종 1년(1660) 3월 소상 직전에 남인 허목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앞서 송시열이 말한 서자에 초점이 두어졌다. 송시열이 말한 서자는 적장자 이외의 아들인 중자(衆子)의 개념을 말하였다. 그러나 허목은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그를 일러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 하고 따라서 3년을 입을 수 없는데, 그는 첩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며 첩의 자식 개념인 첩자라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효종은 첩자가 아니고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인조의 장자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복제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현영정첩 중에서 허목 초상화

선현영정첩은 숙종에서 정조 연간에 활약한 고위관리들의 초상화를 모아 놓은 화첩이다. 허목은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사위이며, 남인 정구(鄭逑)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기호지역 남인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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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의 상소가 올라오자 그 동안 1년복으로 국상을 추진하던 서인 측에서 반발하였다. 특히 허목의 집중적인 표적이 된 송시열은 즉각 반박하였는데, 조대비가 이미 소현세자를 위해 3년복을 입었으므로 효종을 위해 다시 3년복을 입는 것은 부당하며, 허목의 말 속에서 나온 ‘첩자’라는 말은 허목이 임의대로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허목과 송시열의 반박이 한두 차례 진행되었으나 처음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고 그대로 추진되었다.

이러던 차인 4월 18일 윤선도가 장문의 상소를 올려 허목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둘째 아들도 종통을 계승하였으면 적통도 이은 것이라거나, 효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는 이미 장자이고 존자(尊者)이므로 3년복을 입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는 등 송시열의 견해를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윤선도는 이 상소에서 그치지 않고,

“그 두 사람(송시열과 송준길)들 학식과 심술에 있어서는 신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한 행위를 살펴보면 인후하지 못한 자 아니면 슬기롭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설에만은 밝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일생 갈고 닦은 것이 예학(禮學)이라고 하기 때문에 남들도 예학이라면 그들을 추대하고, 자기 자신들도 담당해 왔는데, 그런데 국가 대례에 있어 견해가 틀리기 거의 그 모양이니, 하물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나라를 굳건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는 대계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아, 애석한 일입니다.”

하며 송시열·송준길을 인신공격하였다. 종전까지의 논쟁이 그야말로 사상논쟁이나 학술적 논쟁이었다면, 윤선도의 상소를 계기로 예송논쟁은 정치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윤선도의 상소에 대해 송준길은 즉시 성 밖으로 나갔으며, 서인 측에서는 예론을 가탁한 ‘음흉한 중상모략’이라며 그를 몰아세웠다.

“예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선류(善類)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삼사의 탄핵이 계속 이어졌고, 결국에는 상소를 불태웠으며, 며칠 후에는 삼수로 유배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현종의 보호로 죽음은 피했던 것이었다. 윤선도의 유배로 제1차 예송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1년복으로 국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생존하고 있었기에 조대비에 앞서 인선왕후가 죽음을 맞는다면 다시 재현될 여지를 남겨놓았다.

녹우당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尹善道) 고택(故宅)의 편액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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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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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제1차 예송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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