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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강화 교섭과 정유재란
선조 26년(1593) 4월, 명나라의 유격장군 심유경은 서울의 적군 본진으로 찾아가 다시 일본군에게 화의(和議)를 제의하였다. 원래 이 심유경은 일본 사정에 특히 밝은 명나라 사람으로서, 이여송보다 앞서 조선에 와서는 평양의 일본 진영 속에 들어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화의를 교섭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군들은 그의 이 강화 제의에 대하여, 자기 측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즉시 응한 다음, 서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갔다.
이때 명장 이여송은 일본군의 서울 철수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다시 남하하여 서울에 들어온 뒤 서서히 일본군의 뒤를 쫓았다. 일본군은 이미 멀리 남하하여, 부산을 근거지로 하고 웅천(창원)과 서생포(울산) 사이에 18개소의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을 도모하였다. 일본군의 이런 동향을 지켜본 이여송은 문경에까지 왔다가 돌아갔으나, 다른 장수 유격(劉擊)은 군사를 이끌고 성주에 주둔하고, 오유충(吳惟忠)은 선산, 조승훈(祖承訓), 이영(李寧) 등은 거창, 낙상지·왕필적(王必迪) 등은 경주에 주둔하여, 외곽을 포위하였을 뿐,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심유경을 부산으로 보내 유키나가와 화의 회담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화의 중임에도 불구하고 적은 대병을 들어 우리의 진주성을 공략하였던 것이다.
한편 서울이 수복되자, 그 해 10월에 선조 이하 제신들은 서서히 환도하였다. 그 무렵 꾸준히 교섭 중이던 심유경과 일본 측과의 사이에는 차츰 화의가 진행되어, 적군은 서서히 자국으로 물러가고, 오직 부산 방면에 약간의 부대가 잔류하였을 뿐이었다. 명군도 대부분 요동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그런데 심유경이 제의하는 화의에 대하여 우리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를 반대하였다. 명나라의 주도로 이후 2~3년간 화평 교섭의 사절이 왕래하였는데,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심유경에게 요구한 조건은 대담하게도 명의 황녀를 일본 왕비로 할 것과, 조선 8도 중 4도를 넘겨줄 것, 그리고 조선 왕자 및 대신 한두 사람을 볼모로 보낼 것 등등이었다.
교섭을 직접 맡아 하고 있는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요구가 너무도 망상적인 것이어서, 사실대로 명에 통고하지 못하고 자기네의 술책으로써 판국을 미봉하려 했다. 강화 초부터 의논되어 오던 봉공안(封貢案)을 추진시켰다. 봉공안이란 명나라에서 히데요시를 책봉하여 일본 국왕을 삼고, 일본의 입공(入貢)을 허락하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이것을 명나라 조정에 제의하였던 바, 명나라에서는 의논이 분분하다가, 마침내 책봉만을 허락했다. 선조 29년(1596)에 양방형(楊方亨), 심유경을 정·부사로 삼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본의 아니게 명나라의 방침에 이끌려 부득이 황신(黃愼), 박홍장(朴弘長)을 정·부사로 삼아 명사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의 사신을 오사카성[大坂城]에서 맞이하여 정중한 의식 아래 명의 금책(金冊)를 받고 명사를 우대하였다. 히데요시는 명사에게는 극진한 우대를 하면서도, 우리나라 사신에 대하여서는 접견도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의 무례를 책하기를,
“더러운 미물의 것들이 와서 축하하는군!”
하며 냉대하였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드디어 조선 측 태도의 무성의함을 이유로, 실상은 자기의 야욕이 조금도 실현되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 조선과 명나라 양국의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다시금 조선을 침략할 것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 야욕은 다음해에 바로 나타났다. 선조 30년(1597) 히데요시는 마침내 14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침략해 왔다. 그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는 이미 그 전해 겨울에 거제도에 진을 치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는 그해 정월에 서생포로 입거하였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왜군이 재침한다는 정보를 듣고 또 당황하여 한편으로 명나라에 급고하여 원병을 구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과 모든 물자를 산성으로 옮기어 적군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하는 이른바 청야(淸野)의 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선조 29년(1596) 겨울에 거제도로 선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 서로 모의하기를 이간책을 써서 이순신 장군을 통제사의 지위에서 제거하기로 하고, 요시라라는 첩자를 경상좌병사 김응서에게 몰래 보내어 밀고하였다.
“지금 화의가 결렬된 것은 모두 가토 기요마사의 소치이므로, 나는 기요마사를 몹시 미워하오. 그런데 아무 날쯤 기요마사가 건너올 터이니 조선 수군이 이를 해상에서 맞으면 기요마사를 잡을 수 있고 또 대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군 측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인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술책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병사 김응서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었으나, 일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으면 ‘지정불고(知情不告 : 사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음)’의 죄를 당하기 때문에 그 사유를 도원수 권율에게 고하였다. 권율 또한 덮어둘 수 없는 일이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호기를 놓칠세라 도원수에게 명하여,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날 나아가서 기요마사를 잡으라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인의 계략임을 예측하고,
“바닷길이 험난하고, 또 적이 반드시 많은 복병을 매복하고서 기다린다.”
하여 출병치 아니하였다. 그런데 기요마사의 군사는 이 무렵을 전후하여 건너왔던 것이다. 이에 요시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순신이 그날 출병하였다면, 가토를 꼭 잡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비난하여
“이순신이 국왕의 명을 거역하고 기회를 잃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소.”
하고 탄핵하였다. 선조도 이때는 이순신을 의심하여, 남이신(南以信)을 한산도로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케 하였다. 그런데 남이신은 원래 이순신에게 별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남이신은 조정에 돌아가서 보고하였다.
“과연 기요마사의 배가 건너오다가, 장문포에서 얕은 여울에 걸려 7일 동안이나 머물렀던 것을 이순신은 나가 잡지 않고 그냥 두었사옵니다.”
이 일로 이순신은 사형에 처할 뻔한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그의 후임 통제사 원균의 실책으로 조선 수군이 대패하자 대신 정탁(鄭琢) 등이 강력하게 변호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고 삭직되어 백의로서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종군케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 간계를 부려 다시 요시라를 김응서의 진으로 보내어,
“6, 7월경에 후속 대부대가 건너올 터이니 조선 수군은 놓치지 말고 활동하도록 하시오.”
하는 뜻의 말로 유혹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원군 총병(援軍摠兵)으로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양원(楊元)이 역시 도원수 권율에게 조선 수군을 출동시켜 적의 본토와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라고 요청하였다. 권율은 즉시 원균에게 수군의 출동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도원수와 조정에 대하여 수군의 활동만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우니, 먼저 육군이 남해안의 왜군을 몰아내어 달라고 하며 쉽사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율의 성화같은 독촉에 할 수 없이 전함선을 이끌고 절영도 앞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과 일본군의 유도작전에 패하여 일단 가덕도에 정박하였으나 섬 가운데로부터 적병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었다. 거제도 칠천량에서 적함에게 대패하여 장졸과 함선의 대부분을 탕진하고, 원균 자신도 육상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다가 이름 없는 적병의 칼 아래 어육이 되어버렸다.
원균이 대패했다는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서둘러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았다. 이때 일본군은 수륙 양면에서 대공세를 취하여 전라도로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성을 공략하니, 명장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달아나고 성은 드디어 함락되었다.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여 전주를 장악한 다음,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다시 그의 군대를 북상시켰는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사람을 만나면 귀와 코를 베고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끌고 다녔으며, 집과 숲이 있으면 모두 불을 놓았다.
이렇게 하여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북상하여 직산 홍경원까지 이르렀으나 명장 해생(解生)에게 격파되어 남으로 철퇴하였다. 이때 고니시는 순천에, 가토는 울산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사천에 웅거하고 있었다.
앞서 명나라에서는 우리의 청원에 의하여 형개를 총독으로, 양호(楊鎬)를 경리로 삼아 마귀(麻貴)·유정(劉綎)·진린(陳璘) 등 제장 이하 도합 14만 명을 파병하였다. 이 해 12월에 양호는 마귀의 군사로서 울산에 진격케 하여 왜군의 거성을 포위하고, 적으로 하여금 곤경에 빠지게 하더니, 부산 등지에 적의 원군이 있다는 보고를 듣고 후퇴하였다. 그 후 명의 조정에서는 양호를 소환하고, 대신 만세덕(萬世德)을 경리로 삼아 보냈다.
앞서 통제사로 재임된 이순신은 원균의 패전이라는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전선 12척과 군사를 수습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만으로 적을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순신은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신에게 전선이 열두 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이오이다.”
하여 조정의 계획을 철회케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조 30년(1597) 8월에 서해로 나가려는 왜적의 수군 대부대를 명량(鳴梁) 해상에서 대파하고, 이듬해 고금도로 진영을 옮겨, 피난민을 모집하여 군량과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 또한 명나라 수군제독이 거느린 5천 명의 수군을 맞아들임으로써 군세가 다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무렵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가토군을 공격 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성의 시마즈군을 공격 목표로 한 중로군, 순천 왜성의 고니시군을 공격 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이와 함께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편성한 다음 순천으로 함께 공격하도록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 수원·전주 등을 경유하여 순천 왜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9월 19일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 군사를 포함, 약 3만 6천여 명의 병력으로 순천 왜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수군은 선조 31년(1598)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절이도 해전에서 적선 6척을 격파하고 적병 69명을 살육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조명연합 육상군과 연합전선을 구축, 9월 20일 대대적으로 순천 왜성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후 약 2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이 전투는 11월 19일 노량해전의 대승을 마지막 전투로 하여 7년전쟁, 임진왜란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큰 희생을 치렀으니, 바로 이순신의 죽음이었다.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일본군은 전 함대와 총 병력을 기울여 한사코 돌아갈 길을 열려고 노량 앞바다로 까맣게 몰려들었다. 이때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은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적이 돌아갈 길을 막고, 노량 해상으로 총공격해 들어갔다. 임진왜란 7년의 종결을 짓는 마지막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순신은 까마귀떼같이 몰려 있는 적선들을 향하여 돌격해 들어가는 전선 위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빌었다.
“저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그러자 문득 큰 별 하나가 이순신이 타고 있는 뱃머리를 스쳐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장졸들이 모두 불길한 예감에 놀라는 것이었으나 오직 이순신만은 태연자약하였다. 앞서 싸움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명나라 경리사 만세덕은 이순신에게 글을 보내었다.
“내가 천문을 살피건대 조선국 장성이 빛을 잃어가니, 이는 필시 장군에게 불길한 조짐이오. 장군은 어찌하여 옛날 제갈무후가 수를 빌던 본을 받지 않으시오?”
이에 이순신은 대답하기를,
“명은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순신은 충성과 재덕이 모두 무후만 같지 못하니, 하물며 무후로서도 못 빌은 목숨을 어찌 소장이 빌겠습니까?”
하였으니, 이순신도 이미 자신의 천수가 다했음을 알았던 것이며, 동시에 나라를 위하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보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진두에 서서 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리면서 독전하여 왜적이 돌아갈 길을 끊고, 그들을 모두 섬멸시키려 하였다. 적병들도 사력을 다하여 항전하였다. 포성이 바다를 뒤흔들고, 탄환이 우박같이 쏟아지며 살기가 하늘에 닿은 치열한 격전의 몇 시간, 우리 수군은 장군 이순신의 지휘 아래 적선 4백 척을 격침시키고, 일본 수군 수만 명을 도살 또는 수장하였다. 이제 최후의 돌격전으로 나머지 적군을 섬멸시키려 할 즈음, 이순신은 진린의 배가 적선에 에워싸여 위급함을 보고 그리로 배를 저어가 진린을 구해내는 순간 날아오는 적의 유탄이 이순신의 가슴을 뚫었다. 옆에 섰던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급히 부축하자 이순신은,
“가슴에 철환이 박혔다. 그러나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나를 염려치 말고 나 대신 독전하여라.”
하고는 손에 쥐었던 영기(令旗)를 내맡기고, 그는 장막 안으로 옮겨진 뒤, 54세의 나이로 고요히 눈을 감고 운명하였다. 이완은 슬픔을 억제하며 수기를 받아 독전하였으므로, 싸움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이순신의 죽음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적은 대패하여 뿔뿔이 헤어져서 간신히 도망쳤다. 싸움이 끝난 뒤 진린은 이순신의 배를 향하여,
“이 통제사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소!”
하고 치사하러 왔다. 진린도 이순신의 죽음을 몰랐다. 그때 이완이 수기를 든 채 방성대곡하면서,
“숙부께서는 조금 전에 순절하셨나이다.”
하고 고개를 떨구자, 진린은
“무엇이야!”
부르짖고는 가슴 메이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엎어지기를 세 차례,
“나 때문에 그만 통제사가…….”
하고 통곡하였다. 이 소식이 군중에게 알려지자, 조선 수군은 물론 명나라 군사들까지도 호곡하였는데 그 소리가 바다를 뒤덮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을 지내지 않고도 왕에게 붙여지는 묘호(廟號)를 가진 사람이 있다. 성종의 생부인 덕종과 인조의 생부인 원종, 영조의 첫째 아들이자 정조의 양부인 진종, 정조의 생부인 장조, 헌종의 생부인 익종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생전에 왕위를 누린 일이 없음에도 죽은 후에 왕의 지위에 올라 묘호를 갖게 되었다. 또 조선시대에 살지 않았으면서 추존왕이 된 인물로는 이성계의 직계 사대조인 목조·익조·탁조·환조이다. 이런 추존은 직계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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