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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신문고의 설치와 태종우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골육살상의 쟁탈전 끝에 마침내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재위 중에는 놀라울 만큼 선정을 베풀고 갖가지 치적을 거두어, 건국 초기 국가적인 모습을 확립해 놓은 임금이었다. 그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로서, 종로 네거리에 신문고를 매달아 놓고, 백성들이 마음대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태종 2년(1402) 신문고를 설치하고는 태종은 다음과 같이 교서를 반포하였다.
“내 부덕한 사람으로 대통을 이어받았으니, 밤낮으로 두려워하면서 태평에 이르기를 기약하여 쉴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이목이 샅샅이 미치지 못하여 막히는 근심에 이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제 옛 법을 상고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한다. 온갖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휴척(休戚)을 아뢰고자 하는 자는, 의정부에 글을 올려도 위에 아뢰지 않는 경우, 즉시 와서 북을 치라. 말이 쓸만하면 바로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말이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용서하여 주리라.”
물론 신문고가 아무나 쉽게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의지는 알 수 있다. 태종의 백성에 대한 생각은 여러 가지 일화에서 전한다. 어느 때는 메뚜기로 인해 농사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자 메뚜기를 잡아오라 하여, 그 중에 큰 놈 한 마리를 골라서,
“네가 곡식을 먹어 백성을 괴롭히니, 차라리 내 오장을 긁어 먹어라.”
하고는 산 채로 집어삼켰다. 그것을 본 좌우 제신들이 대경실색하였으나, 마침내 무사하였는데 당시 조선 팔도 안에 극성을 부리던 메뚜기들이 그로 인하여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사찰의 승려들이 부패하였음을 개탄하여 무위도식하는 여러 승려들을 환속시켰으며, 흉년에는 술을 빚지 말라 하고 자신이 술을 끊었으므로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재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전위하고, 상왕 3년째인 춘추 56세에 승하하였다. 그가 승하할 때, 날이 몹시 가물어서 백성들이 애타게 비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죽으면 상제께 아뢰어서 비를 얻어 보내리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과연 그날 밤에 비가 왔으므로, 사람들은 그 비를 가리켜 태종우(大宗雨)라고 이름지었다. 지금도 음력 6월초 열흘이면 태종우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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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신문고의 설치와 태종우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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