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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전세를 바꾼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 즈음 조정에서는 좌의정 유성룡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신립을 도순찰사로 임명하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 일단 순변사 이일을 상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일은 상주로 출정하기에 앞서 군사를 모았다.
그런데 그야말로 오합지졸 그대로였다. 이일이 300여 명의 군사를 징발하기 위해 서울안에 있는 군적을 조사해보니 군사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서리나 유생 등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어 일단 군사를 소집하였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試券)을 가지고 왔고, 서리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와서는 군역을 면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일단 이일은 하는 수 없이 먼저 떠나고, 후에 별장 유옥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아 인솔해서 오도록 하였다. 상주에 도착한 이일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결국 패전하고는 충주에 있던 신립의 군중으로 갔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을 따름이다.”
하였다고 하니 일본군의 기세를 짐작케 한다. 이일이 상주에서 전투를 치를 즈음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탄금대에서 북상하려는 일본군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결국 신립도 패하고 순국하였다. 이렇게 이일과 신립 등이 차례대로 패하면서 선조와 조정은 파천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4월 28일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인심을 무마하는 한편, 파천을 반대하는 일부 여론을 의식해서 궁중에서 몰래 여장을 꾸리면서 바깥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게 입단속을 하였다.
4월 30일 새벽에 궁을 떠난 선조와 그 일행들은 돈의문을 거쳐, 벽제, 혜음령을 거쳐 그날 밤 임진강에 도착하였다. 며칠을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울을 떠나자 도성민들은 공사노비의 문서가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습격하여 이를 불태우고는 내탕고와 창덕궁, 창경궁을 습격하여 금은보화나 귀중품 등을 가지고 갔으며, 선조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과 홍여순의 집을 불태웠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세상이 되었다.
선조의 파천 행렬을 일본군이 뒤따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하늘로 무심하지는 않았나 보다. 서울로 입성한 일본군의 대장 다이라는 히데이에[平秀家]가 종묘에 거처하였는데, 가끔 밤마다 이상한 일이 있고 그곳을 수비하던 일본군이 갑자기 죽기도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이 종묘에 신령이 있으니 오래 거처할 수 없다.”
그러자 히데이에는 종묘는 불태우고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신령들이 그나마 보살핌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국왕의 파천과 육군의 계속된 패전이 이어지면서, 국왕은 다시 의주로 파천하였으며, 여차하면 중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중국에 의사를 타진하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 조선에 희망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바로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과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으로 그나마 일본군의 발목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관군의 연전연패와 국왕의 파천 등을 목격한 전국의 유생들은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봉기하였다. 이때 봉기한 의병 가운데 대표적인 의병장은 곽재우·고경명·조헌·김천일·정인홍·이정함·김덕령 등으로, 이들 의병들은 신분을 초월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하에 봉기하였다. 이들은 주로 적들의 후방을 교란하면서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런 의병의 활동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의 활약이었다. 처음 일본군은 수륙병진(水陸竝進)의 전략을 세우고, 수군은 부산에서 남해를 거쳐 서해로 돌아 나가면서 그들의 육군과 연락을 취하며 북진하려고 하였다. 육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그들 함선은 거제도로 향하였다. 이때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당황하여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함선과 무기를 바다 속에 침몰시키고 노량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는 비장 이영남을 급파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 없이 자기가 지키는 수역을 떠나기 어려웠으나 마음을 정하였다.
“내 나라 안에 들어온 도적을 막는데 무슨 정한 지방이 따로 있을까.”
드디어 전라좌수영의 함대를 이끌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棋)와 연합하여, 거제도 동쪽 해안가인 옥포에서 적의 수군과 대전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적선을 보자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여기는 항구가 좁고 여울이 얕으니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야겠다.”
하고 거짓 물러가는 척하니, 이제까지 쉽사리 이겨 온 왜군은 배를 타고 앞을 다투어 몰려왔다. 이리하여 적의 함대를 넓은 바다로 끌어낸 이순신은 북소리를 신호로 하여 전함대를 돌려 반격하였다. 이순신은 왜군의 배를 닥치는 대로 들이받고, 불을 질러 무수히 격침시키었다. 이순신은 적의 총알에 어깨를 다쳤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북을 치고 기를 휘둘러 독전하였으므로 일본 수군은 대패하여 남은 배를 이끌고 도주하였다. 이것이 첫 해전인 옥포 싸움으로, 이 싸움에 적장 기노지마 이즈모[來島出雲]를 비롯하여 적병 수백 명이 죽고, 적선 수십 척이 격침되었다. 반면에 우리 쪽 손해는 사상자(死傷者) 십여 명에 불과하였으니, 대전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옥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데 기여한 것이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 2월에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왜적의 침입을 예측하고, 함선의 수리와 군사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때 건조한 것이다. 그 형상이 거북 모양이며, 배는 철판으로 뚜껑을 해덮고 그 위에 무수한 철 송곳을 꽂아 적이 쉽게 접근치 못하게 했다. 또 전후좌우에 대포를 걸어놓고, 건장한 군졸들이 배를 젓는데 전진과 후퇴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잠기고 뜨며, 적선으로 돌격해 들어가 이리 받고 저리 밀어 적의 함선을 뒤집어엎기도 하고 대파시키기도 하는 장갑선이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이 거북선을 보기만 하면 겁부터 집어 먹고 달아나곤 하여 전후 수십 차례의 싸움에서 대승하였거니와 두 번째 싸움인 사천해전에서부터 거북선은 닥치는 대로 일본 수군의 함선을 부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가장 무서운 존재로서 바다의 왕자가 되었다.
옥포 첫 싸움에서 대승한 우리 수군은, 계속해서 제2차로 사천·당포(통영 부근)·당항포(고성, 회화 간)에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드디어 이순신이 창안하여 만든 최신예 전함인 거북선이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 제3차는 한산도 앞 바다, 제4차는 부산해전에서 적선을 모조리 쳐부수어 일본군의 혼담(魂膽)을 꺾는 대첩을 거두었다.
제3차 한산도 해전은 임진 3대첩의 하나로 손꼽는 통쾌한 싸움으로, 그야말로 능동적으로 적을 유인해내어, 좌충우돌로써 적의 함선의 대부분을 격파한, 실로 우리 해군의 가장 혁혁한 전승의 하나였다. 7월 6일에 이순신은 이억기와 더불어 본영을 출발하여, 노량에서 원균과 회합하고 삼천포와 진주 창신도에 이르러 일박하였다. 그 이튿날인 7일, 당포에 이르러 적선이 견내량(통영 사등면)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8일 아침 일찍 일제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적의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이 13척이었다.
그때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또 섬이 많아 우리의 판옥선, 등대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뿐더러, 적이 궁하게 되면 능히 육지로 도망칠 수 있는 곳임을 알고, 적의 함선을 한산도 앞 큰 바다로 끌어내어 무찔러 보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대략 한산도는 거제도 서남쪽으로 삼십 리쯤 되는 해중에 위치한 외딴 섬인데, 사방이 바다로 싸여 있어 도피할 곳이 없었다. 또 그 섬으로 피한다 하더라도 굶어 죽기가 십상 팔구인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5~6척을 들여보내어 선봉의 적을 치게 하여 적의 배를 유인하였더니, 적의 여러 배들이 일제히 나오므로 일부러 자꾸 후퇴하는 척하며 적의 함대를 대양 가운데로 끌어냈다. 이때 이순신은 다시 장수들에게 명하여 학익진(鶴翼陣 : 학의 날개 형상의 진)을 벌여 일제히 달려들어 각종 총포를 쏘아 먼저 2~3척을 쳐부쉈다. 그러자 적의 함선이 놀라 달아나려 하자, 우리 수군은 용기백배하여 앞을 다투어 돌진하여 불화살과 탄환을 한꺼번에 쏘아대니 그 형세가 자못 바람과 우뢰 같았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대, 중, 소선 합하여 60여 척이 격침되고, 적병의 익사하는 자와 참수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적선 10여 척은 급히 노를 저어 달아나버렸고, 또 한산도에 배를 버리고 상륙한 적의 수효가 약 4백여 명이었다. 거기서 태반이 굶어죽고, 혹은 떼를 엮어 타고 달아났다. 아무튼 이 한산도 싸움의 승리가 적의 간담을 가장 크게 꺾어 놓아 적이 그 부근에는 그림자도 나타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일대를 우리의 해군 요새지로 삼아, 이듬해 통영을 한산도로 옮겨 설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우리 수군의 이러한 활약으로 인하여 일본 수군은 서해로 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남해안에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선 보급 또한 곤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위와 같은 전공으로 차츰 품계가 높아지더니, 이듬해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충청·전라·경상수군통제사)가 되어 통영을 한산도에 두고 사실상 우리 수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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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전세를 바꾼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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