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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사도세자 묘의 이장과 화성 건설

정조는 즉위 이후 정적들을 제거하고, 규장각 설치를 통해서 친위세력을 양성하면서 서서히 정치적 안정을 찾아갔다. 정치적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정조의 마음을 짖누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부친인 사도세자 문제였다. 어찌됐건 정조는 비운의 죽음을 맞는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에, 그 멍에를 항상 안고 있어야만 하였다. 부친의 신원 문제는 선왕인 영조와 관련된 문제여서 더욱 어려움이 있었다. 부친 사도세자의 정치적 복권은 선왕 영조가 만들어 놓은 의리를 뒤엎은 처사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즉위 초부터 들고 나와서 해결한다는 것은 정조 스스로 정치적 위험부담이 있었다. 정조는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시점을 기다렸다. 정조가 즉위한 지 10여 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포문은 사도세자 묘의 이장문제였다.

화성 동북공심돈

화성의 두 개의 공심돈 중 하나로 창룡문, 동북노대와 동장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내부는 비어 있고 나선형 모형으로 이루어져 소라각으로 불리운다.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로서 포를 쏠 수 있는 수비와 공격이 가능한 화성의 독특한 건물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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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3년(1789)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은 당시 양주 배봉산 기슭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에 다녀와서는 한 장의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에서 박명원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전제하고는 그 참혹상을 진술하였다.

“더구나 뱀 등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또아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박명원은 정조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인물로, 박명원의 상소를 받아 본 정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한나라의 왕의 생부 무덤이 이 지경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상소를 읽은 정조는 자신의 심정을

“어리석게도 밤낮으로 가슴 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하기만 하였다.”

하고 토로하면서 즉각적인 답을 피하였다. 일단 대신들에게 물어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신을 비롯해 조정의 고위 관리들을 희정당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승지에게 박명원의 상소를 대독하도록 하였다. 상소를 다 읽고 나자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대부분이 한목소리로 정조의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물론 정조의 처분이야 뻔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누가 이 자리에서 정면으로 그것의 불가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목이 메인 정조는 잠시 시간을 두고 결국 이장하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조는 바로 이장의 길지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이 일은 정조가 평상시부터 계속 생각하던 터였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먼저 정조는 여러 곳을 거론하면서 그곳의 불가함을 말한 후 이장을 위한 길지로 수원부의 관청 뒤쪽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도선의 이야기에 길지라는 점도 포함되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판중추부사 김익은 찬동의사를 표시하였다.

화성 성곽

서쪽으로는 팔달산(八達山)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평산성이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사적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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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성상의 분부를 들으니 신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겠습니다. 옥룡자는 바로 도선(道詵)의 호인데 그의 논평이 이와 같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그 자리에 참석했던 고위 관료들 대부분이 찬성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옛사람의 논한 바가 이와 같은데 지금에 와서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이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이 없이 결정되었다. 이장과 이장 장소가 결정되자 정조는 측근 세력 서유방을 경기관찰사로, 조심태를 수원부사에 임명하면서, 그에 따른 제반절차에 대해,

“천장해 모시는 일은 사체가 막중하므로, 본원(本園)의 제사 의식도 태묘(太廟)에 버금가는 것으로 대부(大夫)의 예를 사용해서 제사할 것이니 총호사(摠護使)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때에는 삼공(三公)을 의당 갖추어야 할 것이다. 총호사의 임무는 으레 영의정이 관장하는 것이니, 좌상과 우상은 복상(卜相)한 뒤에 가서 봉심(奉審)하라.”

명하여 종묘의 예에 준해서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결국 사도세자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도세자의 이장은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그리하여 약 3개월 뒤인 10월에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어 이장되었으며, 이장하면서 사도세자의 묘는 종전의 영우원에서 현륭원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묘소 옆에 용주사라는 절을 창건하여 현륭원의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

952년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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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 하나가 파생되었다. 이장의 길지로 선택한 곳이 관서가 있는 곳으로 수원부의 읍내였기에 여기에 이미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구상하고 있었다.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해 안주하게 하였거니와, 왕명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책임을 맡은 나의 신하는 감사와 지방관이 바로 그들이다.”

하며 이미 일이 추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수원 팔달산 아래였다. 정조는 수원부민을 이사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이곳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 것을 구상하였다. 정조의 신도시 구상은 화성 건설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화성은 1794년부터 시작되어 약 34개월의 소요기간을 거쳐 1797년 10월 16일 오늘날 준공식과 같은 낙성연을 가졌다. 화성(華城)이라는 명칭은 《장자》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 정조의 의도는 사도세자 묘소인 현륭원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어서 현륭원의 뒷산인 화산(花山)에서 ‘花’를 따서 사용한 것이었다. 화(花)는 화(華)와 통용되었다. 낙성연이 열리는 정조는 양반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도 초대하여 함께 연회를 즐기도록 하였다. 화성 축성 후 이곳에는 정조의 친위 군사부대인 장용영 외영이 주둔하여 방위를 담당하였다.

〈행궁전도〉

화성 안에 있는 행궁을 그렸다. 봉수당·낙남헌·신풍루 등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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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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