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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문학의 세계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서양 선진국으로부터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국강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 문화의 근대화 또한 부국강병에 못지않은 중요한 과제임이 분명했다. 일본인은 자발적으로 외국에 뒤지지 않는 지식과 교양을 쌓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의 학문과 문화에 접근하였다. 외부의 문화와 접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보호 · 육성해 오던 문화에 대한 반성도 깊어졌다.
근대 문학의 태동
메이지 유신 후 10년 정도는 새로운 정치와 경제 · 사회 문제 등에 사람들의 마음이 집중되어 문학에 대하여는 아직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시를 짓는 것보다는 발을 만들라.”는 식으로 실생활과 직결되는 실용적 학문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메이지 초기에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오던 희작 문학(戱作文學)각주1) 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70년(메이지 10년)에 접어들어 자유 민권에 대한 소리가 높아지면서 희작 문학 대신 외국 문학을 일본 문장으로 번안한 소설과 정치 소설 등이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새로운 문학의 태동이었다.
정치 소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작가의 정치적 꿈을 소설로써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이 같은 정치 소설은 문학을 정치도구화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문학이 그저 심심풀이로, 또는 흥미를 느끼기 위하여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제법 지식이 있는 식자층에까지 독자층을 확대시킨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정치 소설도 또한 정치적 견해를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자유 민권의 소리가 낮아짐에 따라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1885년(메이지 18년)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는 그의 저서 《소설신수(小說神髓)》에서 서양 문학 이론을 바탕으로 희작 문학을 비판하고 사실주의 소설론을 제창하였다.
《소설신수》의 영향을 받은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는 1881년(메이지 14년) 도쿄 외국어 학교 러시아어과에 입학하여 러시아문학에 접한 후 그 영향을 받아 《뜬구름(浮雲)》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 소설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문장을 시용하여 그때까지의 문어체와 딱딱한 고어체에 혁신을 가하였다.
《소설신수》가 출간된 1885년(메이지 18년) 도쿄 대학에 재학중이던 오자키 고요[尾崎紅葉] · 야마다 비묘[山田美妙] 등은 켄유사(硯友社)라는 문학 단체를 만들어 잡지 《가라쿠다 문고(我樂多文庫)》를 출판한 이래 마침내는 소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야마다는 후타바테이와 함께 언문일치의 문체를 사용하였으나 중간에 켄유사에서 이탈하였다. 켄유사에는 히로쓰 류로[廣津柳浪] · 가와카미 비잔[川上眉山] · 이와야 사자나미[岩巖谷小波] 등의 쟁쟁한 문인들이 활약하며 1897년(메이지 30년)경까지의 일본 문단을 석권하였다. 이 문단은 문학자만의 좁은 세계였기 때문에 일본 문학을 사회로부터 떼어놓는 결점이 있었다.
1891년(메이지 24년) 하쿠분칸(博文館)에서 출간한 ‘소년문학총서’의 제1편으로 이와야의 《황금환(黃金丸)》이 출간되었다. 메이지 21년 《소년원(少年園)》을 출간한 데 이어 《소년문무(少年文武)》, 《소국민(小國民)》 등의 아동 잡지가 계속 출간되긴 하였으나 소년 · 소녀들의 희망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작품은 좀처럼 출간되지 못하였다. 이럴 때 이와야의 《황금환》은 일본 독서계에 큰 선풍을 일으켰다.
《황금환》은 황금환이라는 개가 아버지의 원수인 호랑이와 여우에게 고통을 가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도 얽히고설켜 좀 어려운 편이고 문장도 문어체였으나 이 같은 이야기에 굶주렸던 아동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와야는 그 후 아동 문학에 정진하여 천여 편에 달하는 아동물을 발표함으로써 아동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고다 로한[幸田露伴]은 고요[紅葉]와 함께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고요와는 달리 작품 가운데 인간의 강한 의지가 넘쳐흐르는 《풍류전(風流傳)》, 《오중탑(五重塔)》 등의 명작을 남겼다. 로한은 또 아동을 위한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여 소설과 전기 등도 집필하였다.
로한과 같은 무렵의 여류 소설가로는 히구치 이치요가 유명하였다.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동생이 어렵게 꾸려가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진주처럼 빛나는 작품을 남기고 25세의 짧은 일생을 마쳤다. 또 소년 · 소녀들의 모습을 그린 《키 재보기》는 근대 소설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탄카(短歌) · 하이쿠(俳句)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도 이 무렵의 사람이었다.
고요와 로한이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던 1890년에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일찍부터 자유민권 운동에도 참가한 바 있었으나 정치의 추태에 환멸을 느껴 인간 정신의 오묘한 문제를 규명하려 하였다.
그는 켄유사 등의 낡은 면을 비판하였다. 시인이며 비평가이기도 하였던 그는 평화 문제에 대하여도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1894년(메이지 27년) 25세로 자살하여 일생을 마쳤다.
일본주의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 국민의 긍지를 크게 앙양시켰다. 이처럼 고취된 국민의 긍지는 자국을 소중히 여기는 이른바 일본주의로 발전하였다. 이 일본주의는 다카야마 · 이노우에 등에 의해 제창되었다.
다카야마는 그 무렵 인기를 모으고 있는 사회 소설을 배격하였다. 그는 사회 소설이 다루는 하층 사회의 불행한 계층들이 국가적 활동에 별로 보탬이 안 되므로 국가가 이를 보호하고 이익을 주는 것은 유해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카야마는 그 무렵 일류 잡지인 《태양(太陽)》을 무대로 일본주의를 제창하여 청년들의 공감을 받았다. 이 일본주의가 부국강병과 외국에 대한 침략을 지지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모험 소설의 등장
국가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소년을 위한 모험 소설이 이 시대에 등장하였다. 1899년(메이지 32년) 오시카와 순로우[押川春浪]가 《해저군함(海底軍艦)》이라는 모험소설을 발표하여 메이지 시대 소년들의 인기를 차지하였다. 그는 많은 모험 소설을 써서 소년 소설의 창시자가 되었다.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로
청일 전쟁 후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청년의 기상을 노래한 최초의 시집이 1897년(메이지 30년)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에 의해 출간되었다. 그의 섬세한 언어 구사와 한결같은 대담성은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참신한 면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낡은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러일 전쟁 후 일본에서는 프랑스 문학의 졸라니 모파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문학이 싹트게 되었다. 자연주의 문학은 지금까지의 고요나 로한의 문학처럼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기교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 생활의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기초가 확립되고 노동자들의 가난한 생활이 현실로 나타나자 문학자들은 밉든 곱든 현실의 모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도손의 《파계(破戒)》는 소외당한 가난한 마을을 둘러싼 사회 문제를 소설 형식으로 멋지게 정리한 작품으로 널리 세간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도손에 이어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 도쿠다 슈세이[德田秋聲] 등 훌륭한 자연주의 작가가 출현하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자연주의 문학이 이에 속하지 않은 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인식되고 있을 무렵,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자연주의에 역행하는 독자적 예술을 창조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풍자적이고 화려하며 공상적인 것이 많았으나 차츰 현실적인 성격을 띠었고, 최후에는 부정적이었던 자연주의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정의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이기심을 초극(超克)할 수 있는가의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그 후의 사상과 문예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1년(메이지 24년) 도쿄 대학을 나온 소세키는 중학교 ·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1906년(메이지 39년)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흥미진진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써내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도련님》, 《풀베게(草枕)》, 《우미인초(虞美人草)》, 《명암(明暗)》 등 50세에 타계할 때까지 많은 명작을 남겼다.
소세키의 문하에서 데라다 토라히코[寺田寅彦]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의 유명한 작가가 배출되었고, 그의 작품과 인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다이쇼(大正) 시대 중기 《붉은 새(赤鳥)》로 새로운 아동 문학을 개척한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도 소세키의 문인이었다. 소세키는 일본의 자연주의가 처해 있는 협소한 장을 뛰어넘어 넓은 시야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특히 지식 계급 전체의 마음의 문제를 파헤쳤기 때문에 지식 계급으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모리 오가이[森鷗外]도 소세키와 함께 근대 일본 문학의 큰 지주였다. 그는 외국 문학에 밝아 외국의 문학 · 사상과 예술의 이론을 소개하고 많은 번역 작품으로 일본 문학에 자극을 주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가난과 병고 그리고 방랑 속에서도 자연주의의 단점을 간파하고 문학은 국민의 자유와 진보를 위하여 사회적인 문제와 직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소설에서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시키지 못하였으나 시 · 화가 · 평론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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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메이지 시대 문학의 세계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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