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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분에이 · 고안의 전쟁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동쪽 섬나라 일본도 복속시키려 하였다. 1266년 고려를 향도로 삼아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의 험한 날씨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쿠빌라이는 거듭 고려에 명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내도록 촉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다시 일본에 사자를 보내어 쿠빌라이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몽골은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도 복속시켰다. 일본이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원나라의 막강한 세력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교역을 갖는다면 무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국서는 막부를 통해 한 달이 지나 조정에 전해졌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으나 국서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막부는 63세의 마사무라[北條政村]가 사임하고, 18세의 도키무네[時宗]가 집권의 자리에 올랐다. 도키무네는 독실한 선종(禪宗) 신자로 나이는 젊었지만 담대한 사나이였다. 조정의 결정과 동시에 막부는 몽골군의 예상 침투 지역인 세토나이카이 연안의 사누키(香川縣)를 엄중히 방비하는 한편 규슈 지방에도 경계령을 내렸다.
쿠빌라이는 그 후에도 몇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아무런 회답이 없자 크게 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270년에는 최후 통첩의 국서를 보내고 일본공략 준비를 서둘렀다.
1274년 10월 3일,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 3만 3천여 명을 실은 900여 척의 군선이 일본을 향해 출진하였다. 몽골군은 5일에 쓰시마(대마도), 14에는 이키 섬(壹岐島)을 점령하였다. 쓰시마의 슈고 소스케국(宗資國) 일족은 모두 전사하고 이키의 슈고 다이라[平景隆]도 패전하여 자살하였다. 이어 19일에는 규슈의 하카타 만에 육박하여 다음날 상륙을 시작하였다.
쇼니를 수장으로 한 규슈의 무사들은 붕고(豊後)의 오토모[大友賴泰], 시게히데[重秀], 히고(肥後)의 기쿠치[菊池武房], 다케자키[竹崎秀長] 등이 분전했으나 전술이나 무기가 막강했던 몽골군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대재부로 후퇴하였다.
일대일 전투에 익숙했던 무사들은 비호처럼 달려드는 몽골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게다가 막부 무사들의 무기는 긴 창이나 독화살을 메긴 강궁이 고작이었으나 몽골군은 막부의 무사들이 생전 구경조차 못했던 철포(鐵砲)를 마구 쏘아댔다. 철포란 지금의 소이탄과 같은 엄청난 화력을 가진 것이었다.
다행히 몽골군은 밤이 되면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군선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몽골군은 낮공격을 마치고 그들의 군선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닥쳐 하카타 만에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휘몰아쳤다. 날이 밝자 어제까지 하카타 만을 가득 메웠던 몽골의 군선은 한 척도 보이질 않고 부서진 나무조각과 엄청난 시체들이 바다 위에 떠있을 뿐이었다. 이때 익사한 몽골군이 1만 3천 500명 정도라고 일본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막부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것을 ‘분에이(文永)의 전쟁’이라고 한다.
이듬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집권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그 사신의 목을 베었다. 이어 1279년 다시 사자가 왔으나 이때도 참수하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보낸 사자들이 잇따라 돌아오지 않자 더욱 노하여 다시 일본 침공을 준비하였다.
한편 막부에서는 몽골의 재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하카타 만 여러 곳에 석축을 새로 쌓아 몽골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규슈뿐만 아니라 산요, 산인 등 서쪽 방면도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 지방의 슈고를 호죠씨 일족으로 교체하였다. 이것은 막부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인 동시에 호죠씨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쿠빌라이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정수일본 행중서성(政收日本行中書省)’이라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였다. 그는 일본을 정복한 후 사용할 농기구와 곡식의 종자까지 준비할 정도로 일본 정복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병력은 1차 내습 때의 5배로 남송병 10만, 군선 3천 500척을 강남군으로 편성하고 몽골, 한인, 고려병 4만과 군선 900척을 동로군으로 편성하였다.
1281년 5월 3일, 고려의 합포를 출항한 동로군은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대마도와 이키 섬을 함락시키고 하카타 항으로 진격하여 시가 섬(志賀島)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무사들이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완강히 대항하자 몽골군은 쉽게 상륙하지 못했다. 막부에서는 밤이 되자 구사노[草野次郞] 등이 작은 배를 타고 몽골 군선에 접근하여 횃불을 집어던지는 게릴라 전을 폈다. 이러한 저항에 고전하던 몽골군은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히젠(肥前)의 다카시마(鷹島)으로 철수하였다.
3천 500척에 10만 병력의 강남군은 이키 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하여 히라토 섬(平戶島)으로 향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로군과 강남군과의 연락이 끊겨 7월 하순에야 다카시마 섬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전비를 점검하고 마침내 하카타를 총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7월 1일 밤부터 기타큐슈 일대에 불어닥치는 태풍으로 몽골군의 대선단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다카시마 섬에 집결한 몽골군은 다시 막부의 공격을 받았으며, 본국으로 돌아간 병사는 겨우 3만여 명에 불과했다. 이 전쟁을 ‘고안(弘安)의 전쟁’이라 한다.
두 차례에 걸쳐 위기를 맞았던 일본은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사실 몽골군의 침공에 조정과 막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가메야마[龜山] 상황은 이세 신궁에서 ‘내 목숨을 국난과 바꾸고 싶다.’고 기원하였으며, 도키무네도 혈서로 불경을 쓰며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태풍으로 인하여 두 차례나 승리했다는 소식이 일본 전역에 전해지자 이것은 분명 가미카제(神風)가 일어난 것이라며 신앙심을 한층 심화시켰다. 이 태풍은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기타바타케는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의 서두에서 ‘대일본은 신의 나라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안의 전쟁 때 분 바람은 사실 입춘 후 210일을 전후하여 일본 일대에 불어오는 태풍이었다. 가미카제도 아닐 뿐더러 신불(神佛)의 가호 또한 아니었다. 몽골군이 패한 이유는 계절적인 특성과 해전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차 침공 뒤 석축을 보수하고 대륙의 전술에 대비한 훈련을 철저히 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막부에서는 다시 있을지도 모를 몽골군의 3차 공격에 대비하여 하카타 만의 수비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한편 몽골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동행성을 부활시켜 일본 침공을 계획하였으나 중국 남부에서 남송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등 국내의 정세가 불안하여 일본을 침공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일본 침공은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계기로 지금까지 막부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장원이나 공령(公領)의 무사들에게까지 세금을 징수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막부의 세력이 확대되었고, 조정이나 귀족들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리고 규슈 지방의 하카타에 진제이 담의소(鎭西談義所)를 설치하고 호죠씨 일족을 배치하여 두 차례의 전쟁에 출전한 무사들을 포상하였다. 이 기관은 나중에 진제이 탐제로 이름을 바꾸고 군사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막부의 세력이 귀족정권을 밀어내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몽골의 침략전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무사들에게는 별도의 포상이 없었다. 막부에서도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에 특별히 나누어줄 것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무사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어진 경제 발전은 무사들의 생활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토착 무사(土着武士)의 실력이 강화되면서 막부의 세력은 차츰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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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분에이 · 고안의 전쟁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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