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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일본

시즈가타케의 싸움

오다 노부나가의 뜻밖의 죽음으로 천하통일 사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의 천하통일의 대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각지의 다이묘들을 복속시켰으며 또 그가 쌓은 오사카 성(大坂城)은 그의 천하통일 사업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세기 일본을 통일하여 혼란한 전국 시대를 종결하였다. 헛된 야욕을 품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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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치 미쓰히데가 패망한 후 14일째인 1582년 6월 27일 오다씨의 주요 멤버들이 오하리의 기요스 성에 모여 대책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3남 노부타카[信孝]를 비롯하여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등 기라성 같은 무장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니죠 성에서 피살된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산보시[三法師]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어르고 달래면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압도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의견대로 어린 산보시를 오다씨의 후계자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노부나가의 영지가 분배되었는데 히데요시는 하리마 외에 야마시로 · 단바각주1) · 가와치를 그의 손에 넣었다.

이처럼 히데요시는 빈틈없는 계획으로 야마시로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교토에도 발을 걸치고 야마토나 단고에도 손을 뻗쳐 그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나날이 팽창하는 히데요시의 세력에 자못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0월 15일 히데요시는 고인이 된 그의 주군 노부나가를 위하여 성대한 추모의식을 교토의 절에서 거행하였다. 그러나 노부타카, 가쓰이에, 가즈마쓰 등은 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진작부터 나가히데에게 부탁하여 불탄 아즈치 성을 서둘러 수축하고 기요스 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산보시를 아즈치 성으로 데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앞서 노부나가의 추모의식에 불참했던 노부타카, 가쓰이에, 가즈마쓰 등은 산보시를 기후 성에 억류하였다. 이미 그들은 히데요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이보다 앞서 가쓰이에는 은밀히 히데요시 토멸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의 영국 에치젠은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려 군대를 움직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양자인 나가하마[長濱] 성주 가쓰토요[柴田勝豊]에게 명하여 일단 화해교섭을 벌이도록 하여 시간을 벌 작정이었다. 그러나 가쓰이에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는 히데요시는 12월 선제공격에 나서 나가하마 성을 공략하여 가쓰토요를 굴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기후 성을 포위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노부타카가 인질을 보내어 항복하자 히데요시는 일단 야마자기 성으로 철병하였다.

1583년 다키가와[瀧川一益]는 이세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가쓰이에 등과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써 히데요시의 주의력을 이세로 집중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가쓰이에는 3월, 아직도 눈이 수북이 쌓인 기타노쇼에서 출병하여 오미로 진출하였다.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즉각 군사를 출동시켜 비와 호 북쪽 시즈가타케(賤嶽)에서 가쓰이에군과 대치하였다. 이 시즈가타케의 싸움은 가쓰이에에 있어서나 히데요시에 있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회전이었다.

기후 성에서 일단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던 노부타카는 히데요시군과 가쓰이에군이 대치하는 상황을 보고 히데요시측의 오가키 성(大垣城)을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히데요시는 즉시 오가키로 출동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쓰이에군이 공격을 감행해 왔기 때문에 히데요시군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었다. 그 밤중으로 오가키에서 60킬로미터의 거리를 6시간의 강행군 끝에 이른 아침 시즈가타케에 도착하여 시바타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불뿜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전세는 차츰 히데요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패배를 의식한 시바타군이 슬슬 꽁무니를 빼어 도망치자 히데요시는 이들을 추격하여 에치젠까지 진출하였다. 에치젠의 성주로서 가쓰이에의 통솔하에 있던 마에다[前田利家]는 죽마고우였던 히데요시를 기꺼이 맞이하고 향도가 되어 기타노쇼에 있는 가쓰이에의 본성을 포위해 버렸다.

가쓰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분전했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가쓰이에는 천수각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으나 그의 아내도 남편의 칼 아래 최후를 마쳤다.

이 시즈가타케의 싸움에서는 히데요시의 호위병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加藤请正], 가타기리 가츠모토[片桐且元],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스야 다케노리[糟屋武則] 등 7명의 무장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여 큰 공을 세웠는데 이들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 부른다.

히데요시는 다시 가가, 엣츄까지 평정하고 이 땅을 나가히데와 마에다에게 나누어 주었다.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차남 노부카쓰에게 기후 성을 명도하고 자결하였다.

사태를 일단 수습하고 아즈치 성에 개선한 히데요시는 일찍이 모리씨와의 강화 때부터 친숙해진 고바야카와에게 편지를 보내어 넌지시 천하를 차지할 자신의 포부를 피력하였다.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의 각오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의 쾌승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가쓰이에의 최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

히데요시가 시즈가타케의 싸움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의 본진을 공격했을 때 가쓰이에는 겨우 3천의 군사로 대항하였다. 물론 히데요시의 대군을 감당해 낼 힘은 없었다.

“이제는 마지막이다.”

라고 말하고 가쓰이에는 갑주를 갖춰 입고 친히 출진하려 하였다. 바로 이때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젊은 무사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대장은 경솔히 죽어서는 안 됩니다. 일단 후퇴하여 본성을 굳게 지키면서 후일을 도모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곳은 소인이 대신하여 기필코 히데요시를 해치우겠습니다.”

200명의 부하와 함께 히데요시의 진중으로 돌진하였다.

이 틈을 타 가쓰이에는 어렵게 본성인 기타노쇼로 돌아올 수가 있었으나 추격해 오는 히데요시군에게 본성마저 포위되어 결국 최후를 맞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가쓰이에의 최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가쓰이에는 예도(藝道)에 관한 소양이 매우 깊은 무장이었다. 7회의 거듭되는 공격에 끝까지 성을 지키지 못하고 천수각 꼭대기에 올라 나의 진지를 향하여 부르짖었다. “자! 이 가쓰이에의 할복하는 모습을 잘 지켜보았다가 길이 후세의 모범이 되게 하라.” 이 말을 들은 양군의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숙연해졌으며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양군의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쓰이에는 먼저 자신의 일족을 모두 찔러 죽이고 마침내 할복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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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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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일본사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신화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변천을 체계적으로 수록했다. 야마토 정권, 귀족정치의 대두, 무사정권의 수립과 군웅할거 시대, 메이지 유신과 전쟁 등..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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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시즈가타케의 싸움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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