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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회 문제의 발생
1887년을 전후하여 내습한 불황의 여파로 농토를 잃은 소작인의 딸들은 때맞추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 방적 · 제사 공장의 여공으로 취업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가난한 농촌에서는 공장에서 생산해 낸 상품은 살 엄두도 못 냈기 때문에 주로 외국시장에 수출되었다.
1886년 통계로 11만 명이었던 노동자의 수가 청일 전쟁 후 43만 명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60퍼센트가 여자 노동자였고 그 반수가 20세 미만의 어린 농촌 처녀였다.
공장에서의 여공들의 노동은 1일 17, 18시간의 노동에 시달렸지만 그들이 받는 임금은 일당 8전에서 10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식대로 매일 8전을 공제하면 나머지는 2, 3전뿐이었다. 그리고 그 임금지불도 1년에 2회, 백중이나 신정에 종합해서 지불되었다.
기숙사 시설도 형편없어 다다미 1장(1평)에 한 사람의 비율로 협소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여공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각지의 여공들은 파업을 일으켰으나 좀처럼 대우는 개선되지 않았고 과로와 비위생적인 환경시설로 인하여 폐결핵에 결려 야윈 모습으로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여공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광산 노동은 더 한층 어려운 목숨을 건 위험한 작업이었다. 미쓰이 · 미이케 탄광에서는 하루 평균 2,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목숨을 건 광산 노동자는 어떠한 방법으로 모집하였을까?
모집인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농촌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농가의 청년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한다. 이 감언이설에 넘어간 청년들이 광부가 될 결심을 하면 모집인은 응모한 청년들을 한 여관에 집결시켜 일정 인원이 모이면 그들을 광산으로 보냈다. 그동안의 경비는 청년들의 가불로 하여 추후 노임에서 공제했다. 이러한 모집인 제도는 방적 여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공업 노동자들은 방적 여공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예를 들면 1903년(메이지 36년)경의 미쓰비시 조선소의 직공 임금은 거의 40전 이상이었고, 60전 이상의 일급을 받는 사람이 3분의 1을 초과하였다. 이것은 중공업이 급속히 발달한 산업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숙련공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제구실을 다하는 직공이 되기까지에는 오랫동안의 도제(徒弟) 기간이 필요하였다. 도제 기간 중에는 무보수이거나 극히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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