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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다노부의 정책
사다노부는 무엇보다도 막부재정의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 대책으로서 사치를 금하고 절약을 강조하는 명령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1789년(간세이[寬政] 원년) 9월에는 기연령(棄捐令)각주1) 을 내려 부채에 눌려 허덕이는 무사들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또 다누마 시대부터 취해오던 산업개발 정책은 물가를 등귀시키고 뇌물의 거래를 만연시키는 것이라 판단하여 이를 폐지하였다. 이와 아울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먼저 교토나 오사카에서 재난에 대비한 비축미(備蓄米) 제도를 실시하였다. 에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시카와 섬에 부랑자 집합소를 설치하고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직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사다노부는 주자학을 한층 더 숭상하여 주자학의 이념을 정치의 정신적 근거로 하기 위하여 학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때까지 막부의 문교 정책의 핵심이었던 성당(聖堂), 창평횡(昌平黌)은 하야시 가(林家)에서 운영하는 글방으로써 사립에 가까웠으나 막부에서는 이를 관학(官學)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주자학의 대가인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오카다 간센[岡田寒泉], 비토 니슈[尾藤二洲]를 막부의 유관(儒官)에 임명하여 주자학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사다노부는 화려한 풍속이나 사치스런 생활을 금지시키는 것 외에 심지어 유흥과 오락까지도 제한하였다. 이처럼 강경한 사다노부의 정책에 일부 백성들의 반감 또한 높아져 다음과 같은 해학적인 동요가 생겨났다.
물이 너무 맑아 고기가 살 수 없을 지경이다.
차라리 흐렸던 논물각주2) 이 그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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