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사
일본인촌의 형성
주인선이 왕래하는 주요 무역국의 항구 도시에는 자연 일본인 남녀들이 정착해 사는 일본인촌이 형성되었다.
일본인촌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상인들뿐만 아니라 막부로부터 죄를 얻어 해외로 도피해온 죄수들도 있었다. 또 천주교 금지정책 이후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인촌에 정착한 일본 사람들은 주인선에서 상품을 사들이는 중간상인, 화물을 하역하는 하역부, 또는 그 지방의 무역상, 유럽 사람들의 상관(商館)에 고용되어 사무원 · 병사 · 선원 등으로 생활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샴의 일본인촌에는 국왕의 호위병으로서 공을 세워 그 이름을 샴 국내에 떨친 사람도 있었다.
1621년 샴 국왕으로부터 에도 막부에 사신이 보내졌는데 그 사신은 아유티아라는 일본인촌의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가 보내는 서신과 선물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 나가마사의 주선으로 일본과 샴 양국은 쇄국령이 내려질 때까지 교역이 계속되었다.
나가마사는 원래 다이묘의 집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자였는데 샴에 건너가 아유티아의 일본인촌에서 차츰 신용을 얻어 마침내 일본인촌의 일을 지시 · 감독하는 추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그 마을에는 일본인이 약 1천 5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800명의 남성들은 국왕의 궁전 호위병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나가마사는 또한 그들 호위병의 대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628년 국왕이 죽은 후 후계자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가마사는 젊은 왕자를 도와 800명의 일본호위병을 거느리고 2만 명의 샴 병사를 지휘하여 반대파를 물리치고 젊은 왕자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나가마사의 명성을 시기한 섭정 카라홈의 음모에 의하여 나가마사는 도리어 아유티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태수로 좌천되었다. 그 후 섭정은 새로 즉위한 국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나가마사는 임지에 부임하여 태수로서 선정을 베풀어 날로 인기가 상승하였다. 당시 이웃나라의 대군이 공격하자 나가마사는 선두에 서서 군대를 지휘하여 어렵게 격퇴시켰으나 불행하게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아유티아에서 왕위를 찬탈하여 새로 즉위한 국왕은 나가마사의 공을 칭찬하여 많은 선물과 함께 미녀를 보내어 아내로 맞게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국왕이 나가마사를 암살하라는 비밀지령이 내려졌다. 화려한 결혼식이 올려진 후 나가마사는 그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게 되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