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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교토와 가마쿠라
경도가마쿠라 시대 때 귀족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린 곳은 전통의 도시 교토와 신흥무사들의 손으로 이룩된 가마쿠라였다.
12세기 무렵의 교토는 화재, 태풍, 홍수 등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크게 황폐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후쿠하라 천도 문제와 요리토모가 군사를 일으키기 수년 전에 있었던 대화재로 대극전을 비롯하여 교토 대부분이 불탄 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죠큐의 난이 상황 측의 패배로 막을 내리자 전통의 도시 교토는 완전히 폐허로 변한 채 토우고쿠 무사들에게 넘어갔다. 새로 주인이 된 무사들은 황폐한 교토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우선 막부의 교토 감시기관인 로쿠하라 탐제가 설치되었다. 그에 따라 로쿠하라를 중심으로 무사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었으며 무사들의 필수품인 투구, 활, 화살, 칼 등의 무장기구를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급 의류와 일용품 등을 만드는 수공업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수공업이 활발해지면서 교토의 3가, 4가, 5가, 7가 부근에는 수공업제품을 파는 점포가 즐비해져서 상설상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폐허가 되었던 교토는 서서히 옛모습을 되찾아 무사 시대 제일의 도시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간토 지방에서는 막부가 설치된 가마쿠라가 크게 번영하였다. 가마쿠라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어느 곳에서든 절단로(切斷路)각주1) 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도시 입구에는 성문이 설치되어 가마쿠라는 책(柵)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도시였다.
가마쿠라가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요리토모가 가마쿠라로 들어오고 난 후였다. 1180년 10월, 가마쿠라로 들어온 요리토모는 해변 가까이 있던 하치만 궁을 쓰루오카로 옮기고 오쿠라(大倉)에 저택을 건설하여 집무를 개시하였다. 현재의 가마쿠라 막부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요리토모는 도시를 정비하고 촌리(村里)의 명칭을 붙이는 등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의 가마쿠라는 소규모 도시였으며, 막부가 위치한 곳은 동서 약 240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현재 쓰루오카 하치만 궁 앞에 있는 연못도 당시에는 논밭이었다고 한다. 또한 막부가 자리잡은 오쿠라와 하치만 궁 부근에는 무사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고, 가마쿠라의 관문에는 심복들을 배치하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였다.
죠큐의 난을 계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와가 강(和賀川)에서 하치만 궁에 이르는 거리에는 번화한 상업지구가 형성되었고, 거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특히 상업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여 가마쿠라에 입주하는 상인의 수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호죠씨 시대에 이르러 엔가쿠지(圓覺寺)나 겐쵸지(建長寺) 등과 같은 절은 모두 가마쿠라의 외곽인 기타가마쿠라에 세워졌다. 야스토키 시대에는 막부도 오쿠라에서 중심부인 와카미야 대로(若宮大路)변의 우쓰노미야(宇都宮) 사거리로 이동하였다.
당시 해상교통이 장거리 수송에 많이 이용되자 가마쿠라에서는 길이 200미터, 폭 40미터의 견고한 방파제를 갖춘 항구가 건설됐다. 선착장 부근에는 연공미 저장고가 있었고, 관세업무를 보는 관도 설치되는 등 교토와 함께 가마쿠라는 크게 번영하였다.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특급 파발은 5일, 보통은 7일이 소요되었으나 보통 사람은 약 15일이 소요되었다. 무사들은 말을 이용했지만 나그네들은 도보여행이 보통이었다. 와가 강을 중심으로 한 해상교통과 토카이도를 주축으로 하는 육상교통의 발전에 따라 교토와 가마쿠라의 경제, 문화는 각지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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