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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미나모토씨의 골육상쟁
단노우라에서 타이라씨를 멸망시킨 요시츠네는 개선장군으로 교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마쿠라에 있는 요리토모는 요시츠네에 대해 냉담하기만 했다. 요리토모는 요시츠네와 친형제 간이면서도 요시츠네를 부하처럼 대하였다. 가마쿠라에서 새롭게 무사들 위에 군림한 요리토모는 그의 명령에 거스르는 자에 대해 가차없이 처단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요리토모의 힘이 강해지자 고시라카와 법황은 힘 있는 무장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견제하였다. 일찍이 법황과 요리토모 사이에는 법황이 작위를 수여할 때 반드시 요리토모에게 사전양해를 얻어야 한다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법황은 요리토모와 요시츠네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면서 요시츠네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리고 법황은 요리토모의 양해 없이 요시츠네를 검비위사에 임명함으로써 요리토모와 요시츠네의 반목을 더욱 조장하였다.
요시츠네는 요리토모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노우라에서 포로로 잡은 무네모리와 기요무네 등을 가마쿠라로 압송하기 위하여 교토를 출발했다.
요시츠네가 사가미의 사카와에 도착하자 요리토모는 호죠[北條時政]에게 그가 압송해온 무네모리 등을 인수토록 하고 요시츠네는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도 요시츠네는 고시고에(腰越)각주1) 까지 들어가 오에[大江廣元]에게 간곡한 서신을 보내어 요리토모의 오해가 풀릴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이 편지를 고시고에죠(腰越狀)라 일컫는데, 요시츠네의 간곡한 심정과 충정이 가득 차 있었다.
요리토모가 요시츠네를 경계하게 된 것은 요시츠네가 단노우라에서 타이라씨를 멸망시키고 교토로 돌아올 때 사람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낸 것과 도키타다[平詩忠]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요시츠네가 보낸 고시고에죠에는 아버지 요시토모가 죽은 후 고생하며 자란 일, 타이라씨를 토멸하고 미나모토씨의 부흥만을 기원한 일, 총령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열심히 싸우던 일, 미나모토씨의 부흥을 위해서는 한 점의 사욕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일 등이 써 있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용서하지 않았고 요시츠네는 가마쿠라를 뒤로 하고 교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시츠네에게 포상으로 주었던 타이라씨 소유의 장원 20여 개를 요리토모가 몰수해 버렸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요시츠네도 차츰 요리토모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둘 사이에 불화가 커지자 미나모토 요리마사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모치히토 왕의 명령을 전국의 미나모토씨에게 전한 바 있는 유키이에가 요시츠네와 한편이 되어 요리토모를 견제하였다.
요시츠네는 법황에게 자신의 결의를 밝혔다.
“요리토모 토멸의 선지(宣旨)각주2) 를 내려 주시든가, 그렇지 않으면 휴가를 얻어 직접 사이코쿠에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은밀히 요리토모의 명을 받은 도사노보[土佐房昌俊]가 요시츠네를 기습하자 요시츠네가 이를 격파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드러나자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츠네와 유키이에에게 요리토모를 토멸하라는 선지를 내렸다. 이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안 요리토모는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대군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쓰루가의 기세 강까지 진출하여 교토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요시츠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대를 모집하였으나 그가 생각한 만큼 군사가 모이질 않았다. 실망하고 당황한 요시츠네는 요리토모의 대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조정에 다음과 같이 청원하였다.
신을 규슈의 지토(地頭)로, 유키이에는 시코쿠의 지토로 임명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요시츠네는 군사 300기 만을 겨우 거느리고 교토를 떠나버렸다. 교토 사람들은 이 같은 요시츠네의 갑작스런 행동을 아쉬워하였다.
요시츠네는 셋쓰의 가와지리(河尻)에서 요리토모 지지 세력인 다다[多田行綱], 도시마[豊島冠者]의 진지를 어렵게 빠져 나왔으나 그를 따르는 병사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다이모노우라(大物浦)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던 끝에 이즈미노우라(和泉浦)에 도착하였다. 이때 요시츠네는 그의 애인 시즈카와 무사시보 등 일행 다섯 명과 함께 야마토국(大和國)의 요시노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의 행적은 얼마 동안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요시츠네가 교토를 떠난 지 이틀 후에 간토의 요리토모군이 교토로 진군하여 고시라카와 원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이러한 상황을 신속히 대처하기 위하여 먼저 요시츠네의 관직을 삭탈하고 요리토모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요시츠네 · 유키이에를 토멸하라.’는 선지를 전국에 공표하였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과 조정에서는 일전의 요리토모를 토벌하라고 내린 선지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질 것을 걱정하며 겁을 먹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요리토모는 전국에는 요시츠네와 유키이에의 체포령을 내리고, 슈고(守護)와 지토를 두어 전답 1단보당 5승(升)의 군량미를 징수할 것을 조정에 지시하였다. 여기서 ‘슈고’라는 것은 막부 측의 지방장관, 군사령관, 경찰직을 통합한 직책으로서 요시츠네 · 유키이에 체포령을 계기로 슈고 조직이 전국에 확대된 것이다. 요리토모는 이 슈고의 자리에 자신의 심복 부하를 임명함으로써 이 조직을 이용하여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지토는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권과 공령이나 장원의 영주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요리토모는 이 지토 조직 또한 사조직화할 계획이었다. 이처럼 요리토모는 종적을 감춘 요시츠네와 유키이에를 색출한다는 구실 아래 자신의 세력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요리토모가 전국의 조직망을 총동원하여 요시츠네의 행방을 끝까지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고, 오직 요시츠네의 애인 시즈카 한 사람만이 요시노 산중에서 체포되었다. 시즈카는 교토에서 유명한 가수 겸 무용수였다.
1186년 3월, 가마쿠라로 압송된 시즈카는 하치만 궁에서 열린 연회에 춤과 노래를 강요당했다. 시즈카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추었다. 시즈카의 공연이 시작되자 모두들 그녀의 자태와 노래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의 노래가사는 임을 그리워하는 일종의 렌가이며 하소연이었다.
“임을 그리며 울고 있자니 옛날의 영화가 다시 떠올려진다!”
요시츠네를 노리는 요리토모 앞에서 그를 그리워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었다.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은 요리토모에게 쏠렸다. 요리토모는 상기된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호령하였다.
“당장 끌고 나가 목을 베어라.”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시즈카의 목숨이었으나 요리토모의 부인 마사코의 설득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요시츠네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기에 그토록 찾을 길이 없었던가?
당시 사람들은 아마도 고시라카와 법황과 섭정을 지낸 바 있는 모토미치(후지와라씨), 그리고 나라의 대사원에서 은신처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요시츠네의 행방에 대하여 《아즈마카가미(吾妻鏡)》각주3) 에는 요시츠네 일행이 승려로 변장하여 오슈로 내려갔다는 소문을 기록하고 있다.
히라이즈미의 히데히라는 요리토모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토호쿠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의협심 강한 호족이었다. 이러한 히데히라가 요시츠네를 은닉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요리토모로 하여금 토호쿠 지방을 공격할 구실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직접적인 무력보다는 정치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하여 법황을 통해 원청의 명을 하달했다.
반역자 요시츠네를 색출하라.
그러나 히데히라는 그 전갈을 무시하고 은밀히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가 1187년 무렵이었다.
요리토모는 거듭 원청의 명령을 전했으나 히데히라는 여전히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그 해 가을, 히데히라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야스히라[泰衡]가 그 뒤를 이었다. 야스히라는 그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으며, 당시에는 형제 간에 내분이 있었고 일족 간에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었다.
조정의 끊임없는 색출명령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요리토모는 천황에게 야스히라 토벌명령을 내려줄 것을 청원하였다. 궁지에 몰린 야스히라는 백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요시츠네의 거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요시츠네를 급습하였고, 쫓기던 요시츠네는 지불당(北海道)에서 자결하여 30세의 생을 마쳤다.
- 1미나모토 요시츠네의 갑옷
- 2미나모토 요시츠네의 갑옷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옷과 정강이받이. 현재는 카스가 신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요리토모는 요시츠네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후지와라씨의 토벌을 중지하지 않았다. 1189년 7월, 가마쿠라를 출발한 28만의 대군이 마침내 야스히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요리토모는 무쓰, 데와 양국을 그의 손에 넣게 되었다.
9월 8일, 야스히라의 토멸과 함께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교토의 조정에 보고하고, 이어 14일에는 정복한 지방의 행정에 착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수년에 걸친 내란이 비로소 종식되고,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정권이 전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일찍이 타이라씨가 멸망한 후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리토모를 교토로 초청하였으나 요리토모는 끝내 이를 거절하고 가마쿠라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1189년, 오슈 정벌을 끝으로 국내가 안정되자 다음해인 1190년 10월, 요리토모는 처음으로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로 올라가 법황과 천황을 알현하고 정이위(正二位)에 올랐다. 또한 권대납언(權大納言)과 우근위대장(右近衛代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무사 정권의 수령으로서 어울리는 정이대장군만을 고집하고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요리토모의 소망은 고시라카와 법황이 타계한 후 구죠[九條兼實]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실현되었다. 정이대장군이란 명칭은 헤이안 시대 당시 에조를 정벌하기 위해 내린 수장의 명칭이었으나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이 되면서부터 막부 수장의 직명이 되었다. 또한 정이대장군을 줄여 ‘쇼군(將軍)’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요리토모는 명실공히 막부의 수장이며 무사의 공량이 되어 무사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막부라는 말은 원래 대장이나 쇼군의 진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요리토모 이후 무사정치를 집행하는 정청(政廳)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였다.
요리토모는 처음 막부 정치를 시작하면서 교토에서 사무적 능력이 뛰어난 오에[大江廣元], 미요시[三善康信] 등을 가마쿠라로 초치하였다. 1184년 10월 오에를 별당(別堂)각주4) 에, 미요시를 집사(執事, 長宮)로 임명하여 재판사무를 관장하는 문주소(問注所)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예전부터 있었던 시소(侍所)각주5) 를 합쳐 막부의 3대 기관인 정치 조직을 형성하였다.
1185년 11월, 조정으로부터 슈고와 지토의 설치가 허용되면서 요리토모는 전국적인 군사권과 경찰권을 한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가마쿠라의 많은 무사와 주종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교토의 천황이나 상황을 받드는 귀족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막부가 임명하여 전국적으로 두었던 지토도 교토 귀족들의 반대에 의하여 타이라씨가 소유했던 영지에 한해서만 두게 되었다. 또 1단보에 5승씩의 연공을 거두어들이기로 했던 일도 중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요리토모의 막부는 무사가 국가를 지배하는 문턱에 서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완전한 무사의 시대가 되기까지는 앞으로도 200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무사 정부인 막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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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미나모토씨의 골육상쟁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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