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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난학의 발달
매년 나가사키에서 쇼군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에도에 올라오는 네덜란드 상관장 일행 가운데에는 의사와 통역이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숙소에는 새로운 외국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8대 쇼군 요시무네는 네덜란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막부 소속의 의사이며 박물학자였던 아오키 곤요[靑木昆陽]와 노로 겐죠[野呂元丈]를 네덜란드 상관으로 보내어 네덜란드말을 배우도록 하여 곤요는 네덜란드어 입문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1771년 봄 에도의 고즈카쓰바라(小塚原)의 형장에서는 사형당한 시체에 대한 해부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현장에는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 스기타 겐바쿠[杉田玄白]가 해부서(解剖書)를 들고 입회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시체를 해부한 결과가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의 그림과 너무나도 똑같은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책을 번역하기로 하고 7, 8명의 의사를 더 가담시켜 4년간의 노력 끝에 1774년 마침내 《해체신서(解體神書)》라는 표제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일본에서 최초로 번역된 서양학술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번역자 겐바쿠는 이 새로운 학문을 난학이라 불렀다.
난학이란 네덜란드의 학문이란 뜻이지만 새로운 학문이란 자각(自覺)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난학은 겐바쿠의 문인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일본이 외국에 대하여 개방한 유일한 창구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는 일본을 연구하기 위하여 특별히 입국하는 유럽인들의 모습을 이따금 발견할 수 있었다.
1690년 켄페르가 일본에 건너와 3년간 체재했다가 귀국한 후 《일본사》를 저술하여 최초로 일본을 유럽에 소개하였다.
1776년에는 세계적인 학자 츤베르크가 일본에 건너와 일본 학자들에게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쳤으며 귀국 후에는 《일본식물지》, 《일본동물지》, 《일본화천지(日本貨泉志)》 등을 저술하였다. 이들 저서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인 학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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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에도시대 난학의 발달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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