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야기 일본

자유민권 운동

自由民権運動

메이지 유신 수행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쓰마 · 죠슈의 지사들은 신정부 조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는 사쓰마 · 죠슈 출신들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그 다음으로는 도사와 히젠 출신이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 성립 초기에는 이와쿠라를 중심으로 하여 오쿠보와 기도 등이 이끄는 사쓰마 · 죠슈 출신 정치가들에 의해 독선적인 정치가 되풀이됨으로써 신국가 건설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차츰 자유 민권을 부르짖게 되었다.

세이난 전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자유 민권 제창자들은 무력으로써 정부에 반항하는 것보다는 언론의 힘으로 민중과 공감대를 이루는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1874년(메이지 7년) 1월 이타가키와 고토 등이 〈민선의원 설립 건의서〉를 발표하고 애국공당(愛國公黨)을 조직한 날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 해에 이타가키 등은 민선의원의 개설을 목표로 고치(高知)에 입지사(立志社)를 설립하였다. 이 조직은 자유 민권의 입장에서 최초로 설립된 정치결사라고 말할 수 있다. 세이난 전쟁이 한창이었던 1877년(메이지 10년) 입지사 대표 가타오카 켄이치[片岡健吉]는 교토에 있는 천황에게 국회개설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나 담당 관리는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 건의서에는 8개항에 걸쳐 정부의 실정을 공박하고 이 같은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국회를 개설하여 입헌정체(立憲政體)의 토대를 구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다시 지조를 경감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구미 제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입지사가 탄생한 도시는 자유 민권론자의 요람처럼 보였다. 1878년(메이지 11년) 4월 이타가키는 다시 입지사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애국사(愛國社)를 일으키기로 하고 각지의 단체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정부에서는 5월 오쿠보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자유 민권론자들을 암살 용의자로 보고 공중목욕탕까지 미행하는 등 철저한 감시를 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애국사를 일으킨 사람들은 메이지 12년에서 13년에 걸쳐 이따금 대회를 개최하여 국회개설을 청원키로 하고 10만 명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명칭도 국회기성동맹으로 개칭하였다. 메이지 13년 11월의 제2회 국회기성동맹대회에서는 그 명칭을 대일본 국회기성 유지공회(有志公會)로 바꾸었다. 또 이때 유지들이 모여 자유당을 만들기로 약속하고 정당 창당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이렇게 타오른 민권 운동의 불길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민중 운동으로써 고조되기에 이르렀다. 민권파의 목적은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정권을 독점하는 이른바 번벌(藩閥) 독재를 없애고 국회와 헌법을 만들어 이에 의해 정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일본사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신화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변천을 체계적으로 수록했다. 야마토 정권, 귀족정치의 대두, 무사정권의 수립과 군웅할거 시대, 메이지 유신과 전쟁 등..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자유민권 운동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