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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어느 날, 당시의 최고 실력자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대저택에서는 귀족들의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듯이 잔치가 파한 후 모토쓰네의 부하들은 잔치음식의 찌꺼기를 먹으면서 한마디씩 했다.

“젠장, 우리들은 어느 세월에 이 고구마죽을 실컷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고구마죽이란 마를 잘게 썰어서 단물과 함께 찐 요리로 당시에는 꽤 사치스런 음식이었다. 이 말을 들은 도시히토[藤原利仁]라는 사나이가 큰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실컷 먹여줄테니 날 따라오게나!”

이 사나이는 호쿠리쿠(北陸) 지방의 호족으로 후에 국사(國司, 지방관)를 거쳐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까지 역임하며 도시히토[藤原利仁] 장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당시에는 수도에 올라와 모토쓰네를 섬기고 있었다.

도시히토는 그 사나이를 데리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이 비와 호를 지날 무렵 30여 명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이들을 맞이했다. 쓰루가(敦賀)의 도시히토 저택은 꽤 어마어마하고 훌륭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히토와 그 사나이는 여독에 지친 몸을 우선 쉬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 사나이는 뜰을 바라보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는 뜰 가득히 깔린 멍석 위에 길이 2미터 정도의 마가 처마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이것은 도시히토의 명에 의해서 인근에 있던 마를 하룻밤 사이에 모은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많은 남녀들이 가마솥을 여러 개 걸어 놓고 고구마죽을 끓이고 있었다. 얼마 후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긴 고구마죽이 그 사나이 앞에 놓였다. 그 사나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렸다.

이 이야기는 《콘자쿠 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에 실려 있는 것이지만 만약 마 대신에 칼을 가지고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호족들이 기동력을 갖춘 무사집단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무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무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부라우모노각주1) 에서 유래했다. 헤이안 시대 각 지방의 호족들은 선조로부터 세습된 토지를 기반으로 그 지방의 유력자로 군림하였으나 중앙에 올라가서는 귀족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정도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도시히토 장군이 모토쓰네를 섬긴 경우가 바로 이런 사례로 여기에서 사무라이라는 말이 생겼다 한다. 따라서 사무라이는 결코 무사로서 명예스러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중앙 귀족의 수족노릇을 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방에 많은 장원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장원을 관리하기 위해 이러한 호족들의 힘이 필요하였다. 호족은 호족대로 소지주(小地主, 名主)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여 장원영주(莊園領主)의 이익을 수호하는 한편 영주의 지나친 독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즉 지방 호족들은 중앙 귀족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귀족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호족은 국사의 명령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국사 쪽에서도 세금을 걷어들이기 위해 보다 강력한 힘이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호족 가운데 유력자를 추포사(追捕使)나 압령사(押領使)로 임명하여 국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호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국사들 중에는 추포사나 압령사의 관직을 겸임하며 호족들을 지배하려는 자가 나타났다.

당시 중앙에서는 후지와라씨가 아니면 귀족이라 하더라도 그 세력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출세에도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같이 미약한 귀족들도 지방에 내려가면 호족이나 소지주들로부터 후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다. 이처럼 지방의 호족들은 귀족을 수령으로 추대하려 하였고, 중앙의 귀족들 가운데에도 지방에 내려가 무사집단의 수령이 되고자 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초기 무사들의 모습

일본 중세의 유명한 문학 작품 〈타케토리 모노가타리〉의 일부. 달나라 궁성으로 되돌아가려는 카구야히메를 막기 위해 황제가 군사들을 시켜 카구야히메를 지키는 장면에서 무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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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귀족이라 하더라도 황실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귀족이 훨씬 유리하였다. 이 조건을 이용하여 지방에 세력을 이식시키는데 성공한 것이 타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源氏]였다.

타이라씨가 지방에 세력을 가지게 된 것은 간무 천황의 증손 다카모치[高望] 왕이 ‘타이라[平]’라는 성을 하사받고 가즈사국(上總國)의 장관이 되면서부터였다. 그의 손자 마사카도[將門]는 수도로 올라가 검비위사(儉非違使)가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히타치(常陸)의 호족 미나모토 마모루[源護]를 습격하여 그의 세 딸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마모루는 마사카도의 사촌 사다모리[平貞盛]와 함께 마사카도의 난폭한 행동을 조정에 고발함으로써 파문이 확대되었다.

또한 마사카도는 히타치 국부(國府)각주2) 를 공략하여 국수의 관인을 탈취하였다. 이것은 조정에 대항하는 행위였다. 마사카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다음과 같은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

“이미 역적이 된 바에야 간토[關東] 8국을 공략하고 이어 교토(수도)로 올라가겠다.”

그는 우선 시모쓰케국(下野國)과 고주케국(上野國)의 국도를 파죽지세로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하들로부터 신황(新皇)으로 추대되어 시모우사(下總)에 왕성을 세우려 하였으나 사다모리와 이와 협력한 시모쓰케의 압령사 히테사도[藤原秀鄕]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 무렵 이요(伊豫) 지방의 관리였던 후지와라 스미토모[藤原純友]는 그 지방의 호족으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히부리 섬(日振島)을 무대로 해적을 지휘하여 세토나이카이를 휩쓸고, 때로는 요도 강을 거슬러 올라와 교토 시가지를 노략질하였다. 그의 세력은 시코쿠(四國)의 여러 지방과 기이(紀伊), 스오(周防)에 미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스미토모를 토벌하기 위해 오노[小野好吉]를 파견하였다. 추격당한 스미토모는 치쿠젠까지 도망쳐 대재부(大宰府)를 노략질하였다. 오노는 해륙 양면작전으로 이요까지 도망친 스미토모를 살해하였다.

이 마사카도와 스미토모의 사건을 연호에 따라 ‘죠헤이[承平], 덴교[天慶]의 난’이라 부른다. 이 사건은 당시 무사의 세력이 천하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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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일본사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신화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변천을 체계적으로 수록했다. 야마토 정권, 귀족정치의 대두, 무사정권의 수립과 군웅할거 시대, 메이지 유신과 전쟁 등..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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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호족 세력의 대두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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