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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무장승병의 대두
원청의 최고 실력자 시라카와 법황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산법사(山法師)라 불리는 승병(僧兵)의 무리였다. 법황 편에 서야 할 산법사가 도리어 법황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원래 승려는 율령상 일반농민들과는 달리 조세와 부역이 면제되어 있었다. 이런 점을 노려 11세기 무렵에는 세금을 기피하기 위하여 사원으로 들어가 중이 되는 농민이 증가하였다. 이들은 불교의 수행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나 사원의 입장에서는 사원이 소유한 장원을 지키기 위해 이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술을 수련시키며 강력한 승병집단으로 조직한 것이다.
사원에서는 이 조직이 커지며 강해지자 국사의 지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엔랴쿠지(延曆寺), 온죠지(園城寺), 고후쿠지(興福寺) 등은 국사와의 투쟁은 물론 그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침해당하면 조정에 몰려와 소동을 벌였다.
나라의 고후쿠지는 카스가[春日] 신사(神社)의 신목을 받들고, 히에이 산[比叡山]의 엔랴쿠지는 히에[日吉] 신사의 신여(神輿)를 받들고 조정으로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것을 강소(强訴)라고 한다. 법황이나 귀족들은 신을 경외하였으므로 그들의 무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승병들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근 100년에 걸친 원정 시대 동안에 60여 회에 걸쳐 강소를 감행하였다.
이 같은 강소에 골치를 앓고 있던 조정에서는 검비위사 마사모리[平正盛]와 그의 아들 다다모리[忠盛]를 우치(宇治)에 파견하여 고후카지의 승병을 저지하였다.
시라카와 법황은 일찍이 마사모리로부터 토지를 기부받은 일도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타이라씨를 옹호하였다. 요시이에(미나모토씨)의 아들 요시치카[義親]가 이즈모에서 난동을 일으켰을 때도 마사모리를 파견하여 진압하는 등 타이라씨는 승병의 강소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명성을 떨치면서 차츰 미나모토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다다모리는 시라카와 법황의 신임을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시라카와 법황 다음의 도바 법황 때는 33간당(間堂)각주1) 을 세운 공로로 1132년 다지마(但馬)의 국수 겸 형부경(刑部卿)이 되어 승전(昇殿)각주2) 이 허용되는 특전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타이라씨는 차츰 미나모토씨의 라이벌로 부상하게 되었다.
다다모리는 각지의 국사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세토나이카이에서는 상선을 운영하고, 규슈에서는 송나라의 상선과 무역을 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수도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원청의 궁녀들까지 출입하였다. 다다모리의 아들 기요모리[平淸盛]도 아버지의 후광으로 출세하였다. 이제 타이라씨는 다다모리와 기요모리 2대에 걸쳐 쟁쟁한 실력자가 되었다.
타이라씨와는 반대로 미나모토씨는 요시이에의 손자 다메요시[爲義]가 수장이 되었으나 후지와라씨를 섬기면서도 그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 세력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뒤 내분이 자주 일어나 12세기 중반에는 타이라씨보다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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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헤이안 시대 무장승병의 대두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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