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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무네 시대 개혁의 효과
세간에서는 8대 쇼군 요시무네를 가리켜 쌀 쇼군이라 불렀다. 그것은 요시무네가 쇼군의 자리에 있는 동안 쌀값의 등락이 심하여 가격조정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1732년 여름 세토나이카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메뚜기떼의 피해가 극심하여 서일본 일대의 벼가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2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1만여 명이 아사하는 지경에 빠졌다.
이 때문에 에도나 오사카에서도 쌀값이 폭등하여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1733년 정월 마침내 에도에서 빈민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같은 사건의 발생으로 쌀값이 크게 오르내렸기 때문에 막부의 재정안정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환전상(換錢商)들은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서 화폐의 양을 늘릴 것을 제안하였다. 막부에서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1736년 5월 또다시 질이 떨어지는 화폐를 개조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시적으로 쌀값의 하락을 일단 저지시킬 수는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막부의 재정을 안정시킬 수는 없었다. 도리어 전체 물가가 오르면서 무사계급을 크게 괴롭혔다. 요시무네가 쇼군의 자리에 오른 초기에는 새로운 정치를 소신껏 해보겠다는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체념 비슷한 절망감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요시무네의 장남 이에시게[家重]는 변변치 못했으나 차남 무네타케[宗武], 4남 무네타다[宗尹]는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요시무네는 이에야스가 어삼 가를 세웠던 예에 따라 무네타케를 에도 성의 다야스(田安), 무네타다를 히도쓰바시(一橋)에 거주토록 하고, 다야스 가[田安家], 히도쓰바시 가[一橋家]를 세워 이에시게 때 세웠던 시미즈 가[淸水家]를 합쳐 삼경(三卿)이라 불렀다.
이것은 쇼군의 후사가 끊겼을 경우에 대비함과 아울러 3가를 잘 융합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로부터 쇼군의 후사가 없을 때에는 반드시 3경의 가문에서 쇼군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1745년 요시무네는 30년 동안 지켜왔던 쇼군의 자리를 그의 장남 이에시게에게 물려주고 잠시 동안 자문을 담당하다가 1751년 6월 68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처럼 요시무네는 한 가지 이상으로써 시종일관 그의 정치를 실현시키려 했던 쇼군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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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요시무네 시대 개혁의 효과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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