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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히데요시 시대 상업의 발달
상인들은 농민이 생산한 상품을 운반하거나 매매하는 수단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규모가 큰 거래는 주로 다이묘를 상대로 하는 장사였다. 태합검지 실시 이후 연공이 주로 쌀로 징수되었기 때문에 매년 막대한 양의 쌀이 다이묘들의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이 쌀을 교토나 오사카의 시장에 운반하여 매매하는 것은 모두 다이묘와 결탁한 어용상인(御用商人)이 담당하게 되었다.
사카이의 상인 이마이[今井宗久]는 일찍부터 노부나가와의 인연에 힘입어 노부나가로부터 자반각주1) 류의 관세 징수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무기상(武器商)으로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로부터 철포 이외에 갑옷 · 투구 · 화약 등의 주문은 물론 이쿠노(生野)의 은산(銀山) 경영권까지 독점하였다.
다이묘와 상인과의 결탁은 노부나가와 이마이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후에 주인선(朱印船)각주2) 의 무역으로 유명해진 오미나토(大湊)의 무역상들은 일찍부터 이에야스와 결탁되어 있었다.
다이묘들에게 있어서도 먼 곳으로 군대를 파견할 때 무기와 군량을 정리, 운반하는 일은 상인에게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데요시와 가장 밀착된 상인으로 유명한 것은 사카이의 상인 가문 출신의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씨는 일찍부터 명나라와의 무역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상인이었다. 유키나가의 아버지 류사[小西隆佐]는 히데요시로부터 사카이 봉행으로 발탁되었으며, 규슈 정벌 때는 군량 등을 수송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그의 아들 유키나가는 규슈 정벌 수군을 지휘한 공로로 히고 남반부의 24만 석(石) 다이묘로 출세하였다. 이처럼 히데요시는 상인들도 적절히 등용하여 천하 통일사업에 이용하였다.
일본의 경지면적은 헤이안 시대 말기인 10세기 초에 86만 정보였던 것이 16세기 후반에는 150만 정보로 늘어났다. 검지에 의한 전국의 수확량은 1천 800만 석이었던 것이 1956년에 이르러서는 경지면적 330만 정보, 수확량 7천 200만 석으로 엄청난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의 수송을 맡은 호상(豪商)은 단고의 미야즈(宮津)에서 쌀 3천 석을 규슈의 나고야까지 운반하였는데, 그 운임은 1천 석당 200석으로 운반하는 물자의 2할에 해당하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이를 통해 다이묘와 결탁한 상인들이 얼마나 축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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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히데요시 시대 상업의 발달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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