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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일본

어삼 출신의 쇼군

에도 막부의 토대는 3대 쇼군 이에미쓰 시대에 이르러 확고히 구축되었다. 그러나 평화가 계속되고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차츰 정치도 문란해지고 막부와 다이묘의 재정 상태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이때 쇼군의 자리에 올라 정치를 개혁하고 재정을 정비하여 막부를 부흥시키려 한 사람이 8대 쇼군 요시무네[古宗]였다.

요시무네는 1716년 나이 겨우 8세 때 죽은 7대 쇼군 이에쓰구의 뒤를 이어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요시무네는 22세 때 55만 석의 번주가 되었는데 선천적으로 무예를 좋아하는 호쾌한 남아로 항시 3척(尺)이 넘는 큰 칼을 차고 다녔으며 힘도 장사였다. 그는 검소질박을 생활의 신조로 삼아 겨울철에도 속옷은 무명이었으며, 자제들에게도 무명옷을 입히고 평소 현미를 즐겨 먹었다.

그러나 부하들에게는 매우 인정이 많아 선심을 쓰는 성격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그의 마부가 종이로 짠 모기장을 바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죽이나 덥겠는가!”라며 즉시 목공에게 명하여 마굿간 2층에 창문을 내어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농정에도 힘을 기울여 농민의 생활안정과 수입증대에 기여하였다.

이처럼 명군으로서의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에 그가 쇼군의 자리에 오르자 천하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며 기뻐하였다. 과연 그의 정치는 지금까지의 고질적인 관례를 깨고 소신껏 일을 처리해 나감으로써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요시무네는 노중들을 불러놓고 그들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막부의 1년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가? 성에 투구가 몇 개나 있는가?”

그러나 노중들은 한 사람도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노중들은 요시무네 앞에서는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제1대 쇼군 이에야스 시대부터 격식으로써 정해져 있는 사항에 대하여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도 폐지하지 않겠지만 그 나머지 일은 내 소신껏 깨끗이 처리하겠다.”

이렇게 말하고 요시무네는 5대 쇼군 쓰나요시 시대부터 정돈상태에 빠져 있던 재정을 활성화시키고 부패한 관리와 문란했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시효 적절한 조치를 취해 나갔다. 이 같은 요시무네의 개혁 정책을 ‘교호(享保)의 개혁’이라 부른다.

또 요시무네는 살생금지령이 공포된 후 전면 금지되었던 매사냥을 원래대로 장려하고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이따금 매사냥을 즐겼다. 또 부하들에게 승마 · 수영 · 무예를 실시하고 그 기량을 평가하기도 하였다.

1724년에는 다이묘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금하라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막부의 지출을 줄이고 다이묘와 기본의 낭비를 단속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사치금지령이 발표된 후에도 시민들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치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화려한 옷을 즐겨 입던 그들은 안감을 겉옷보다 더 화려한 옷감으로 사용하고 금은세공물도 그을려 헐값의 물건처럼 보이게 하는 풍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법령이 좀 누그러지면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가고, 강경해지면 다시 사치가 수그러드는 등 근본적인 사치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몰랐다.

한편 재판은 예로부터의 습관이나 선례를 중요시하였으나 권력과 재판관의 재량만으로 적당히 판결하는 경우도 많았다.

요시무네는 1742년 형벌에 관한 규정 100개조를 제정하였다. 그 특색은 당시까지 답습되어 온 전국 시대 형벌의 폐단을 대폭적으로 개정한 것으로써 추방형의 경감, 연좌죄의 범위 축소, 형벌의 이완(弛緩)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요시무네가 이처럼 형벌규정을 개정한 것은 막부의 정치에 법을 중요시하고 조례를 확립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가 일시적인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커다란 이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이기 위해서였다.

1721년 윤 7월 에도 시내 한복판의 번화가 니혼바시(日本僑)에 색다른 방문이 나붙었다. 행인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 방문을 바라보느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방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달부터 매월 2일, 11일, 21일의 3회에 걸쳐 평정소(評定所) 밖의 의자에 투서함을 내다 놓을 것이다. 쇼군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정오까지 진정서를 그 투서함에 넣도록 하라. 그 진정서에는 반드시 주소와 성명을 기재해야 한다.
에도 시대의 니혼바시

에도 시대의 유명한 판화가 안도 히로시게의 작품. 니혼바시는 에도 시대부터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행인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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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진정서는 요시무네가 직접 펴보기로 하였다. 요시무네는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려 하였다. 이 투서에 의해 요시무네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시약소(施藥所)와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또 서방법도 제정하였다. 투서함 제도의 고안자는 요시무네의 심복 오오카 다다스케[大岡忠相]였다.

다다스케는 훌륭한 재판관으로서도 유명하였다. 막부의 정치를 개혁하는 일은 쇼군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시무네의 주위에는 훌륭한 보좌역이 여러 사람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다다스케는 특출한 인물로 정치 · 경제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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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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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일본사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신화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변천을 체계적으로 수록했다. 야마토 정권, 귀족정치의 대두, 무사정권의 수립과 군웅할거 시대, 메이지 유신과 전쟁 등..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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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어삼 가 출신의 쇼군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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