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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개항 후의 상황
존왕양이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는 가운데 새로이 개항된 항구 도시 요코하마(橫浜)에는 외국의 무역선이 입항하고 도시가 형성되면서 화려한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항구의 한가운데에 무역사무를 취급하는 운상소(運上所)가 생겼는데 바로 이 자리가 지금의 가나가와 현청(縣廳) 자리였다. 그리고 이 운상소를 중심으로 서쪽은 일본인의 거주지, 동쪽은 외국인의 거주지로 책정되었다. 에도를 비롯한 기타 지역의 상인들도 무역의 편의를 위하여 이곳으로 이주해 왔으며 이를 총괄하는 막부의 어용상인 미쓰이[三井]도 마지못해 이곳에 지점을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이곳 개항장 요코하마에서는 외국인의 행패로 인한 유혈사건이 반년 동안에 4건 발생하여 6명의 외국인이 살해되는 등 외국인과의 충돌사건으로 어려운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1862년 8월 21일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히사미쓰의 행렬이 가나가와 가까이 있는 나마무기(生麥)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때 히사미쓰는 천황의 막부 개혁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에도로 갔다가 귀환 중이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 4명의 말 탄 영국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단 길 옆에 피해 섰다가 되돌아가기 위해 돌아서는 순간 히사미쓰의 행렬과 부딪히게 되었다. 히사미쓰의 가마를 호위하던 무사가 ‘무례한 놈’이라고 소리치며 단칼에 베었다. 영국인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자 한 무사가 단칼에 목을 날려 버렸다. 나머지 영국인들도 모두 허리를 잘라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요코하마 시내를 들끓게 하였다. 요코하마의 외국인들은 크게 흥분하여 정박 중인 영국 · 프랑스 · 네덜란드의 해병을 총동원하여 히사미쓰를 체포하기 위해 큰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영국의 대리공사 니르는 이들의 소요를 진정시키고 1863년 2월 영국 정부의 명령으로 막부가 사죄할 것과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요구하였다. 또 사쓰마 번에 대하여는 하수인을 영국 사관(英國士官)의 앞에서 처형할 것과 2만 5천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를 거절할 경우 무력으로써 관철시키겠다고 위협하며 12척의 군함을 요코하마에 집결시켰다. 막부에서는 이에 굴복하여 5월 9일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키로 하고 어렵게 이 사태를 수습하였다.
나마무기 사건은 죠슈와 기타 존왕양이파를 극도로 흥분시켰다. 막부도 이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여 5월 10일부터 양이정책을 실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 날을 기다리고 있던 죠슈 번에서는 갑자기 시모노세키(下關) 앞바다에 정박 중인 미국 상선을 포격한 데 이어 23일에는 프랑스 통보함(通報艦), 26일에는 네덜란드 군함을 포격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1일에는 미국 군함, 5일에는 프랑스 군함이 시모노세키에 나타나 죠슈의 군함 2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대파하였다.
같은 무렵 가고시마에서도 영국 함대와의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863년 6월 27일 영국 대리공사 니르를 태운 7척으로 편성된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만에 들어와 나마무기 사건 관련 하수인의 처형과 배상금의 지불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고시마 번주는 당시의 하수인들은 행방불명되어 찾을 수 없으며 배상금 문제는 막부와 협의하여 처리하겠다고 회답하였다.
그러자 니르는 7월 2일 우선 사쓰마의 기선 3척을 나포하였다. 이를 본 사쓰마 쪽에서는 때마침 불어오는 폭풍을 이용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강력한 영국 함대도 폭풍 때문에 작전이 여의치 않자 일단 철수하였으나 가고시마의 시내 1할 정도가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1863년 8월 5일 영국 · 미국 · 프랑스 · 네덜란드는 양이파를 응징하고 양이파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죠슈를 공격하였다. 이들 네 나라의 연합 함대 17척은 시모노세키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2천여 명의 육전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모두 파괴해 버렸다.
죠슈 번은 14일 마침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수락하고 항복하였다.
1. 해협을 통과하는 외국 선박을 우대한다.
2. 포대를 수축하거나 새로 만들지 않는다.
3. 전비(戰費)를 지급하기로 하되 그 금액은 에도의 공사단 협의에 일임한다.
이 두 차례에 걸친 싸움으로 정치의 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특히 사쓰마 번은 양이 정책을 무역 정책으로 전환하려 하였다. 이 같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대일 외교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막부가 일본을 대표할 수 없으므로 조정과 교섭하여 조약의 칙허를 받지 않고서는 양이 정책의 근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막부를 버리고 반막부 세력인 사쓰마 번에 접근하였으며 영국과 대립하는 프랑스는 막부에 접근하여 자국의 세력을 확대하려 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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