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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호죠씨의 집권
죠큐의 난이 끝난 3년 뒤, 막부의 실권자 요시토키가 1224년 6월 급사하였다. 그러자 그 후계자 문제를 놓고 음모가 일었다. 무사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미우라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놀란 로쿠하라 탐제 야스토키와 도키후사는 급히 가마쿠라로 내려왔다.
요리토모의 미망인 마사코는 서둘러 그 음모를 분쇄하고 미우라를 징계함과 동시에 야스토키와 도키후사를 싯켄으로 명하였다. 두 싯켄 가운데 한 명을 후에 연서(連署)라 부르게 되었다. 이는 막부의 공문서에 싯켄과 함께 서명한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가마쿠라 막부의 동량격인 마사코가 죽고 그에 이어 히로모토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마사코의 죽음은 당시의 싯켄 야스토키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합의 정치기구인 평정중(評定衆)을 구상하게 되었다.
평정중(評定衆)은 정소(政所), 문주소(門注所)의 관리와 미우라, 요시무라 같은 유력한 무사들 그리고 야스토키, 도키후사 등 1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평정 제도는 그 후 오래 지속되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시대까지 이어졌다. 만약 이 합의기구에서 의견이 대립되어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다수결로 결정할 때 야스토키는 특히 도리를 강조하였다.
얼마 후 야스토키는 무사의 도리를 기본으로 한 법률을 만들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법률은 500년 전에 만들어진 조정의 법률과 이에 의한 율령으로 현실에 맞지 않았다.
야스토키에 의해 법률이 제정된 것은 그가 집권이 된 9년째인 1232년 8월의 일이었다. 이 법률은 51개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이라고도 하고 또 당시의 연호를 사용해 ‘죠에이시키모쿠(貞永式目)’이라고도 불렀다.
이 시키모쿠는 가마쿠라 막부를 이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도 무사의 법전으로서 중요시되었고 전국 시대 다이묘(大名)의 법률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법률제정에 개척자적 역할을 한 야스토키는 1242년 6월,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야스토키의 후계는 그의 손자 쓰네토키[經時]였으나 겨우 4년 만에 쓰네토키의 동생 도키요리[時賴]에게 자리를 넘겨야 했다. 도키요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도키요리는 싯켄의 자리에 오르기 전,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탁발승으로 변장하고 전국을 두루 다녔다. 그가 고즈케의 사노 지방을 지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 저녁 무렵이었지만 하룻밤을 유숙할 집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얼마 동안을 가다보니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도키요리는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다.
그 집의 주인인 쓰네요[常世]는 원래 사노장(佐野莊)의 영주였으나 일족 간의 분쟁으로 영지를 빼앗기고 몰락한 상태였다. 집이 어찌나 가난하였던지 위로리(圍爐裏)각주1) 에 땔 나무조차 없었다.
쓰네요는 이 나그네를 위하여 평소 애지중지 가꾸던 화분을 꺼냈다. 거기에는 잘 다듬어진 매화나무 한 그루가 꽃 피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쓰네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매화나무를 꺾어 위로리에 불을 지폈다. 이윽고 매화나무가 다 타버리자 이번에는 소나무 화분을 꺼내 놓았다. 그는 또 소나무를 꺾어 불을 지폈다. 나그네가 만류하였으나 쓰네요는 계속 불을 지폈다. 그러나 화분의 소나무가 얼마나 오래 타겠는가. 소나무가 다 타버리자 집주인 쓰네요는 마지막 벚나무 화분마저 꺼내어 다시 불을 피우면서 나그네와 세상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절이 바뀌어 대지를 뒤덮었던 눈이 녹을 무렵 가마쿠라에서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쓰네요는 야윈 말에 몸을 싣고 가마쿠라로 달려갔다. 이윽고 쓰네요는 기라성 같은 다이묘들이 시립해 있는 도키요리 앞에 고개를 숙였다.
도키요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쓰네요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얼굴을 들어 나를 보시오. 화분의 나무를 때어 나를 따뜻하게 대해 준 그대의 갸륵한 정성을 나는 잊을 수가 없소. 그때의 보답으로 매화나무 골, 벚꽃나무 골, 소나무 골의 영주로 임명할 터이니 사양하지 마시오.”
이 이야기의 진위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도키요리의 선정을 찬양한 사람들에 의해 전승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이처럼 도키요리는 막부 체제의 확립과 집권 정치 발전에 힘을 기울였으며 무사들 또한 막부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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