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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고다이고 천황의 결기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중에 모리나가[護良] 친왕이 있었다. 그는 에이 산에 들어가 이름을 손운호[尊雲法] 친왕이라 고치고 1327년 12월 약관의 나이에 천태종의 주지가 되었다. 모리나가 친왕은 오토노미야[大塔宮]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친왕이 에이 산에 들어간 목적은 불교의 수행보다는 에이 산의 불교 세력을 고다이고 천황 측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막부 타도의 거사 계획이 무르익어 가던 1331년 천황의 신임을 받았던 요시라가 가마쿠라 막부에 계획을 누설하고 말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내친 김에 에이 산을 근거지로 막부와 일전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한발 앞서 로쿠하라에 있던 막부의 군대가 천황의 궁궐을 포위하려 하였으므로 고다이고 천황은 가까스로 나라로 도망쳤다. 그 곳에서 다시 가사기 산(笠置山)으로 달아나 가사기지(笠置寺)로 들어갔다. 가사기 산은 높이가 200미터 정도의 낮은 산이었으나 기즈 강(木津川)을 끼고 있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 위에 승병의 수도 많았고 죠큐의 난 때 막부로부터 가혹한 처벌을 받은 자의 자손이나 다이카쿠지 계통에 유감이 있는 장원의 무사들이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계획에 호응하여 그곳에 모여들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고다이고 천황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였는데 다름 아닌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였다. 마사시게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천황 측에 가담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태평기(太平記)》에는 마사시게와 고다이고 천황과의 만남을 천황이 꿈 속에서 하늘의 말을 듣고 마사시게와 만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마사시게의 출현이 너무나 뜻밖이었고, 그의 활약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에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사시게는 가마쿠라 시대 초창기부터 세습적으로 영지를 지키면서 막부에 봉사하고 중요한 지위를 누려왔던 종래의 무사들과는 그 유형을 달리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무사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1331년 9월 가마쿠라 막부는 대군을 동원하여 가사기 산 공격에 나섰다. 막부의 대군이 노도처럼 가사기 산을 공격했으나 마사시게의 선방으로 20일이 걸려서야 어렵게 함락시켰다. 이 사이 고다이고 천황은 가사기 산에서 탈출하여 아카사카 성(赤坂城)으로 이동하던 중 막부군에 체포되어 교토의 로쿠하라로 보내졌다.
이보다 앞서 가마쿠라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이 가사기 산으로 도망치자 황태자였던 지묘인 계통의 가즈히토 친왕을 천황으로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고곤[光嚴] 천황이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이 천황의 상징인 3종의 신기를 가지고 도망쳤기 때문에 황태자는 신기를 받지 못한 채 천황의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 체포된 고다이고 천황은 로쿠하라에 유폐된 채 신기를 고곤 천황에게 인도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모조품을 인도할 뿐 끝까지 천황의 자리를 양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두 천황이 자리를 다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사이 마사시게는 가와치(河內)의 아카사카 성에 웅거하고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체포되었으나 그의 황자 오토노미야와 다카나가 친왕을 성으로 맞아들였다. 이 성은 위아래 두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다지 험고하지는 않았으나 요소요소에 성채를 쌓고 장병 상하가 일치 단결하여 공격해오는 대군과 항전하고 있었다. 당시의 전투양상은 그 옛날 미나모토씨와 타이라씨의 싸움처럼 일대일을 주로 하는 전투가 아니고 많은 병사가 일개 집단을 이루어 높은 절벽 위나 산에 성을 쌓고 공략해 오는 적과 싸우는 것이었다. 성이라 해도 오랜 시일을 두고 견고하게 쌓은 성도 아니었다. 아카사카 성에 웅거한 마사시게야말로 이러한 전투에서 그 지략과 책모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용병가이며 무장이었다.
1332년 2월 22일 수만 명에 달하는 막부군이 위의 성인 아카사카의 본성을 공략해 왔다. 마사시게는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사정 거리에 육박하는 적에게 일제히 화살을 쏘거나 큰 돌을 굴려 막부군을 산산조각 냈다. 28일에는 1천 800여 명의 적을 섬멸하였다. 성에 있는 마사시게의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마사시게의 교묘한 작전으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사기 성이 함락되자 그 성을 공략하던 군사도 아카사카 성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막부군의 공세는 더욱 치열해졌다.
막부군은 성을 멀리서 포위하고 성안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나왔다. 원래 마사시게는 아카사카 성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할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달 가까이 버티고 보니 앞으로는 며칠 더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마사시게는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 냈다.
“이대로 있다간 생명을 헛되이 잃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이 성을 빠져나가 언젠가는 적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죽은 것처럼 가장해야겠다. 우선 성안에 굴을 파고 전사자의 시체를 그 안에 넣어라. 그리고 그 위에 섶을 잔뜩 올려놓고 폭풍이 부는 밤을 기다려 성에 불을 질러라.”
마침내 기다렸던 폭풍의 밤이 다가왔다. 마사시게의 병사들은 일제히 불을 지르고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야음을 타고 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마사시게는 그 후 얼마 동안 행방이 묘연하였다. 막부군은 불타버린 성에 들어와 굴 속에서 불타 죽은 시체를 보고 마사시게도 분명 죽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리나가 친왕도 성에서 빠져나와 나라의 한냐지(般若寺)에 숨어 있었다. 그를 추적하던 500여 기가 육박해 들어오자 모리나가 친왕은 절 안에 놓여 있는 커다란 옷궤 속에 몸을 숨겨 어렵게 위기를 모면하였다.
아카사카 성이 함락되자 일단 세상은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막부는 그 동안 로쿠하라에 유폐시켰던 고다이고 천황을 조큐의 난 후 고토바 상황을 유배시켰던 예에 따라 오키 섬에 유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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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고다이고 천황의 결기 – 이야기 일본사,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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