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자 귀족들과 승려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 백성들은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융성했던 국운은 기울기 시작했다.

많은 백성들은 힘겨운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농토를 버리고 귀족이나 절 그리고 호족들의 장원으로 도망치는가 하면 고향을 떠나 부랑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는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모모카와는 제48대 쇼토쿠[稱德] 천황의 후계자로 조정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덴지 천황의 손자 시라카베[白壁] 왕(王)을 고닌[光仁] 천황으로 옹립하였다. 고닌 천황은 당시 62세의 고령이었다.

얼마 후 모모카와는 황후가 천황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모함하여 황후와 황태자를 감옥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고닌 천황의 황후는 쇼무[聖武] 천황의 황녀였다. 따라서 이 황후만 제거하면 고닌 천황과 후지와라씨의 사이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닌 천황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수의 관리를 줄이고 승려의 정치적 발언을 금지시켰다. 또 농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병역의 특혜를 부여하고 율령 제도를 엄격히 시행하였다.

이때 마침 토호쿠 지방에서 에조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켜 760년 안찰사(按察使) 기노 히로즈미[紀廣純]를 살해하고 다가 성을 점령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정동대사(征東大使)를 파견하였으나 반란 세력을 진압하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고닌 천황이 퇴위하고 황태자가 간무[桓武]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간무 천황은 침체된 경제와 군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우선 수도를 옮기기로 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현재의 수도는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토호쿠 지방의 반란 진압에도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784년, 간무 천황은 마침내 나라에서 나가오카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나라는 7대 73년 동안 야마토 정권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

간무 천황이 즉위한 것은 그가 45세 때였다. 그에게는 황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사와라[早良] 친왕을 황태자로 책립하였다. 그런데 사와라 친왕은 후지와라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후지와라씨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지와라씨 가운데서도 후히토[藤原不比等]의 네 아들 난[南] 가(家), 홋[北] 가, 시키[式] 가, 쿄[京] 가 등이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간무 천황이 새로운 수도 나가오카로 천도한 다음해인 785년 정월, 새로 지은 궁에서 새해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새로운 수도의 궁궐공사는 기초공사만 이루어졌을 뿐 그 내부공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간무 천황은 잠시 어수선한 나가오카를 떠나 옛 수도 나라로 돌아오고 동생인 사와라 친왕을 나가오카에 머물게 하여 정무를 보도록 하였다. 조궁 담당 장관 시키 가의 다네쓰구[藤原種繼]는 공사가 예정대로 진척되지 않아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

785년 9월 23일 밤, 다네쓰구가 말을 타고 공사현장을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으로부터 화살이 날아와 다네쓰구의 가슴을 꿰뚫었다. 다네쓰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황당한 소식을 접한 간무 천황은 즉시 나가오카로 돌아오게 되었고 범인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취조 결과, 그 배후 세력으로 오토모씨와 사에키씨[佐伯氏]가 지목되어 엄한 처벌을 받았다. 오토모씨와 사에키씨는 후지와라씨와는 적대관계에 있었으며 황태자인 사와라 친왕과는 매우 가까웠다. 이러한 점에서 사와라 친왕도 다네쓰구 암살의 배후 조종 세력이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얼마 후 변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