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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의 싸움
세키가하라 전투, Battle of Sekigahara히데요시가 죽은 후 다이묘들 가운데서 이에야스와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도시이에였다.
도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부하로서는 히데요시보다도 선배였다. 도시이에 역시 히데요시의 호의를 받아들여 히데요시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히데요시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임종에 가까울 무렵 병상에서 일어나 도시이에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히데요리의 장래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부탁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후 겨우 반년 만에 도시이에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도시이에가 죽은 후 이에야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다이묘로는 5봉행의 필두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었다. 미쓰나리는 도시이에가 죽기 전부터 여러 차례 이에야스 암살을 기도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하였다. 그러나 도시이에가 죽고 난 후 가토 기요마사 등으로부터 위협을 받자 숙적인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미쓰나리의 음모를 파악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구원키는커녕 미쓰나리에게 근신을 하도록 권하였고, 일시적으로는 미쓰나리를 구원해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야스는 차츰 독재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1600년 정월에는 오사카 성에 들어가 히데요리와 동등한 자리에 앉아 제국 다이묘들의 신년하례를 받기도 하였다.
이를 지켜 본 미쓰나리는 마음속으로 이에야스를 토멸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럴 즈음 같은 해 6월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나와 아이즈의 가게카쓰[上杉景勝]를 토벌하게 되었다. 가게카쓰는 5대로의 한 사람이었는데 전년부터 그의 영지 아이즈에서 공공연히 이에야스와 자웅을 겨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이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토호쿠로 떠나면 반드시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주 천천히 토카이도를 따라 행군하고 에도에 이르러서는 느긋이 휴식을 취하면서 7월 24일에야 겨우 시모쓰케의 오야마(小山)에 도착하였다.
과연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있던 미쓰나리는 7월 초 먼저 오사카 성에 들어가 요시쓰구[大谷吉繼], 안코쿠지[安國寺惠瓊]를 비롯하여 봉행의 동료인 마에다, 나쓰카, 마시타 등과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 편의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들이 오사카 성에 남긴 처자를 인질로 잡으려 하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다다오키[細川忠興]의 부인은 이를 거부하여 가신의 손을 빌어 목숨을 끊기까지 하였다.
미쓰나리에게 호응한 데루모토를 비롯하여 우키다, 고니시, 시마즈, 고바야카와, 죠소카베(長宗我部盛親) 등이 잇달아 오사카로 집결하였다. 이들 미쓰나리의 군대는 이미 이에야스가 없는 후시미 성을 공략 · 포위하고 있었다.
미쓰나리 등의 거병소식이 오야마에 있는 이에야스에게 전해진 것은 7월 24일이었다. 이에야스는 아이즈의 가게카쓰 정벌을 취소하고 방향을 바꾸어 간사이 방면으로 군대를 진출시킬 결심을 하였다. 이에야스가 서둘러 에도 성에 되돌아온 것은 8월 6일이었다.
한편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미쓰나리 등 서군(西軍)과 결전을 벌이기로 한 다이묘는 후쿠시마, 이케다, 호소카와, 야마노우치, 도도 등으로 이들 이에야스군을 동군(東軍)이라 불렀다. 동군 · 서군이란 명칭은 다만 이에야스 측과 미쓰나리 측을 구별하기 위한 명칭일 뿐 그들 영국(領國)의 지리적 위치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히타치의 사타케씨는 서군에 가담했다. 히고의 가토는 도요토미씨의 심복이었는데도 고니시와의 불화 때문에 이에야스의 편지를 받고 규슈에서 동군에 가담키로 결심하였다.
이에야스는 마침내 에도 성을 나와 9월 10일 오하리의 기요스 성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미쓰나리 등의 서군은 오가키 성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에야스군과의 거리가 30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다. 당초 서군의 작전계획은 일단 동쪽으로 진출하여 히데요리를 추대하고 미카와 부근에서 동군과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단고의 호소가와씨와 오미의 교고쿠씨 등이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서군을 교란켰고, 서군 측의 데루모토가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리를 보호하면서 자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야스는 기요스에서 다시 진군하여 오가키 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오카야마에 본진을 설치하였다. 이에야스를 맞이한 동군의 사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으나 오가키에 포진한 서군은 히데요리 · 데루모토가 좀처럼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그해 9월 14일 밤 오가키 성에 있던 미쓰나리는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를 무릅쓰고 갑자기 성을 나와 15킬로미터 정도 서쪽 세키가하라로 후퇴하였다.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가키 성을 공격하지 않고 아카사카(赤坂)에서 단숨에 세키가하라를 거쳐 서쪽으로 진격할 빠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세키가하라는 예로부터 난공불락의 관문으로 미노 · 오하리 · 이세 · 오미 등의 각 방면과 연결되는 산간 지대였다. 미쓰나리는 이 요충지에 진지를 구축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동쪽에서 공격해 오는 이에야스의 동군을 맞아 싸울 작정이었다. 당시 동군의 총병력은 약 10만, 서군은 약 8만이었다. 천하가 걸려 있는 대결전이었다.
9월 15일 오전 8시경 보슬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자욱히 깔린 가운데 양군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양군의 공방전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격렬한 접전이었다. 정오가 될 무렵까지도 승부가 나지 않았으나 미쓰나리 부대와 우키다 부대의 분전으로 전세는 서군 쪽의 우세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동군의 총수 이에야스는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가 가장 믿고 있던 서남방의 고바야카와 부대가 아직도 이에야스 쪽에 가담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에야스는 참다못해 일제히 사격을 명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고바야카와가 이에 호응하여 마침내 마쓰오 산(松尾山)을 내려오면서 서군에게 맹렬한 돌격을 감행하였다.
서군의 요시쓰구는 일찍이 문둥병으로 실명한 사람이었으나 뛰어난 지략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작부터 고바야카와의 배반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의 돌격에 뒤이어 다시 턱밑에 있던 와키사카 부대와 아카자 부대까지 갑자기 동군과 내통하여 마구 공략해 오는 데는 아무리 지략이 뛰어난 요시쓰구로서도 도저히 당해낼 힘이 없었다. 서군의 지장 요시쓰구는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정오까지 우세했던 서군의 전세가 오후 2시를 고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때까지 잘 버티던 이시다 · 시마즈 · 고니시 부대도 잇따라 격파되었다. 이시다와 고니시는 서북쪽의 이부키 산으로 도망쳤으며 우키다와 시마즈 등도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키가하라의 싸움은 오후 4시경에 이르러 동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미쓰나리는 특히 배반을 한 고바야카와를 크게 책하면서 10월 1일 고니시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 무렵 이에야스는 이미 오사카 성에 들어와 있었다. 서군에 가담했던 여러 다이묘를 처벌한 후 동군의 제장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영지를 몰수당한 서군의 다이묘는 90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모시씨처럼 감봉(減封)된 다이묘도 있었다. 이때 몰수 · 감봉에 따른 총석고(總石高)는 660만 석에 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렇게 몰수 · 감봉된 석고를 많은 가신들을 독립 다이묘(獨立大名)로 승격시켜 배분하였다. 그 결과 간토에서 토카이도에 진출한 다이묘의 수가 65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금후 어떤 방법으로 전국의 지배 체제를 강화 ·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패한 미쓰나리는 이부키 산 깊숙이 들어가 숨어 있다가 죽마고우였던 다나카[田中吉政]에 의해 체포되어 이에야스에게 압송되었다.
재판결과 사형이 확정되어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미쓰나리는 목이 몹시 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였다. 가까이 있던 무사가 물 대신 곶감을 주자 미쓰나리는 곶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곶감은 몸에 해로울 뿐이다.”라고 말하고 먹기를 거절하였다.
무사는 기가 막혀 이렇게 비웃었다.
“잠시 후면 목이 잘릴 터인데 그렇게 몸을 아껴 무엇하겠소.”
그러자 미쓰나리는 또 말하였다.
“인간이란 죽는 순간까지 몸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과연 미쓰나리다운 배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즈의 가게카쓰는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끝난 후 이에야스에게 항복하고, 120만 석의 영지 아이즈에서 데와 · 요네자와의 30만 석의 영주로 전락되었다. 서군의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도 원래의 영지 8국 83만 6천 석에서 스오 · 나가토의 2국 37만 석의 영주로 몰락하였다.
이들은 영지를 감축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90명에 이르는 다이묘들은 아예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몰수된 영지의 합계는 428만 3천 석에 달하였다. 이렇게 몰수한 영지는 동군에 가담했던 다이묘들에게 포상하였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하리 · 기요즈의 30만 석에서 아키의 50만 석으로, 이케다 데루마사는 미카와 · 요시노의 17만 석에서 하리마 · 히메지의 52만 석의 영주로 영전하는 등 후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다이묘로 출세한 자도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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