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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전한시대

왕망의 찬탈

황룡(黃龍) 원년(기원전 49) 선제가 미앙궁에서 죽자 27세의 태자 석이 즉위하니 이 이가 원제(元帝)이다. 그는 선제의 황후 왕씨를 황태후로 높여 받들었다. 원제의 어머니 허황후는 곽씨에게 독살되었다. 선제는 그 후 곽광의 딸을 황후로 맞이했으나 곽씨 일족이 주살될 때 곽황후도 폐출되었다. 그 후 선제는 후계자 문제를 에워싼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하이 후궁들한테서 자식을 낳지 않고 후덕한 여자를 하나 골라 황후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바로 왕씨이다.

원제는 유교를 좋아하고 병약하였다. 유교는 무제 때부터 국교로 지정되었으나 실제로 그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원제 재위 26년 동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제의 아버지 선제가 걱정한 대로 원제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래서 유가 출신의 인물을 많이 등용하여 유교의 이념에 따라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원제의 이상주의는 아랑곳없이 현실 세계는 매년 흉년이 들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많았다.

원제는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 5월에 죽었다. 이 해 정월에는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두 번째 내조(來朝)하였다. 이 해에 연호를 경녕으로 고치고 호한야 선우에게 한나라 액정(掖庭, 후궁) 왕장(王嬙)을 시집 보내어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 왕장의 별호가 소군(昭君)인데 본명보다는 별호인 왕소군으로 더 알려져 있다.

선우의 아내가 되어 정든 고국을 떠나 흉노 땅으로 가야 했던 왕소군의 슬픈 사연은 후세 작가들에 의해 윤색되어 동정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많은 후궁 가운데 한 여인을 골라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 조정에서는 누구를 골라야 할지 몰랐다. 오랑캐에게 미인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의논 끝에 화공에게 명하여 모든 후궁들의 화상을 그려 올리도록 하여 그 화상을 보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실물이야 어쨌든 화상만 예쁘게 그려 바치면 후보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흉노로 떠나는 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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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모에 자신이 없는 후궁들은 다투어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용모를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용모에서나 두뇌에서나 자신에 차 있던 왕소군은 한 푼의 뇌물도 주지 않았다. 심사 결과 선우의 아내로 발탁된 것은 왕소군이었다.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화공이 대충 그렸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원제도 왕소군의 뛰어난 자태에 놀랐으나, 일단 결정된 일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왕소군은 눈물을 흘리며 정든 고국을 떠나야 했고 뜻밖에 절세의 미녀를 맞게 된 선우는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결국 이 사실은 원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후궁의 화상을 그렸던 화공은 임금을 속인 죄로 처형되었다. 후세 시인들은 이 왕소군을 소재로 그의 애틋한 심정을 시에 담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더라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이 시는 왕소군이 오랑캐 땅에 가서 장안의 봄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을 읊은 노래로 가장 잘 알려진 시의 한 구절이다.

원제의 황후 원후(元后)는 왕씨였다. 그의 친정인 왕씨가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원후의 힘이었다.

원후의 이름은 정군(政君)으로 원제가 죽고 원후가 낳은 아들 유오(劉驁)가 성제(成帝)로서 26년간 재위하였다. 성제는 처음에는 명군으로서의 소질이 있었으나 중간에 여자에 빠져 평판이 좋지 않았다.

원후의 조카인 왕망은 성제 말년에 대사마가 되었다. 왕망의 숙부 왕근(王根)이 사직한 뒤를 이어 그 요직에 오르게 되었다.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열후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는 등 젊은 시절은 매우 불우하였다. 그의 고모인 원후는 이런 왕망을 가엾게 여겨 특별한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성제 다음은 애제(哀帝)·평제(平帝)가 있었는데 모두 약질이고 단명하였다. 애제는 20세에 즉위하여 26세에 죽고, 평제는 9세에 즉위하여 24세에 죽었다. 이 같은 황제의 유약과 단명은 외척 세력의 강화를 부채질하였다. 외척 왕가의 권세를 한 손에 쥔 사람은 젊은 시절 불우했던 왕망이었다.

일찍이 애제 시대에는 애제의 생모인 정씨(丁氏)와 조모인 부태후(傅太后)가 건재하여 외척인 왕씨의 권세는 한때 약화되었다. 주색에 빠졌던 성제에게는 아들이 없어 원제의 측실(側室, 첩)인 부씨 소생의 정도왕(定陶王) 유강(劉康)의 아들 유흔(劉欣)이 즉위하여 애제가 되었다. 그러나 애제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씨의 불우했던 시대는 겨우 6년에 불과했다.

애제가 죽자 원후는 왕망을 불러 대책을 의논한 끝에 9세인 중산왕(中山王)을 맞아 황제로 세우니 이 이가 평제(平帝)이다. 원후는 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조정에 나오고 왕망이 대사마로서 사실상 정사를 전담하였다.

중산왕에게는 그의 생모 위씨(衛氏)가 있었는데도 왕망은 그녀를 중산국에 억류시켜 장안에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왕망의 장남 왕우(王宇)가 이 일을 간하다가 도리어 왕망의 노여움을 사 자살을 명령받았다.

이보다 앞서 왕망의 차남인 왕획(王獲)이 노예 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의 법령으로는 노예를 죽인 사람은 처벌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능히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망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그 사건을 다루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망은 그 아들을 호되게 꾸짖고 자해토록 하여 정당한 죄값을 받도록 하였다. 왕망이 자신의 장남을 자살시킨 그 해에 평제의 생모 위씨도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주살하였다. 이 해에 또 왕망의 딸이 황후로 책봉되는 납채의 의식이 있었고 그 다음해 그녀는 황후가 되어 입궐하였다.

왕망의 딸이 황후가 되자 그의 권력은 점점 비대해졌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왕망은 신임 관료들이 흔히 저지르는 불손하고 거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부하에 대하여도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정치적 행동을 취했다. 또 당시 가장 문제거리로 대두된 토지의 겸병(兼倂)과 노예의 축적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민심을 수렴하는 조치를 자주 취하였다.

어느 때 태황 태후는 왕망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2만 8천 호와 256만 헥타아르의 토지를 상으로 내리려 하자 왕망은 이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 같은 왕망의 행동은 토지의 겸병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의 고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또 천재지변이 극심했던 어느 해에는 왕망이 자진하여 1백만 전(錢)의 돈과 토지 3천 헥타아르를 희사하여 재해민을 구제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조정과 민간의 230가구로부터 전답과 주택이 헌상되어 많은 재해민들을 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망의 소문이 점점 퍼져 그의 미덕을 칭송하는 자들이 많았다.

평제 원시 2년에는 황지국(黃支國)에서 물소를 바쳐왔다. 황지국은 지금의 월남 남쪽에 있던 나라였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성천자가 출현하는 징조로서 진기한 짐승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장안으로부터 3만여 리나 되는 먼 나라에서 이 같은 진기한 짐승이 헌상된 것은 상서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같은 해에 황룡이 강에 나타나 노닐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모두 왕망이 조작한 것이었다. 왕망은 황지국의 왕에게 값비싼 선물을 보내고 그로 하여금 물소를 바치도록 한 것이며 황룡이 나타났다는 소문도 왕망이 퍼뜨리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이들 상서로운 조짐들이 모두 자신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처럼 꾸며 한나라를 찬탈할 작정이었다.

원시 5년 평제가 14세의 나이로 급서하였는데 사실은 왕망이 독살한 것이었다. 평제가 자신의 생모가 왕망에게 죽은 것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왕망에게는 안한공(安漢公)의 칭호가 내려졌다. 한왕(유방)조를 편안하게 한 왕망의 공을 표창한다는 뜻이었다. 한나라 창업 이래 생전에 공의 칭호를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형(宰衡)’의 칭호까지 더해졌다. 주나라 성왕을 보좌한 주공을 태재(太宰), 은나라 탕왕을 보좌한 이윤을 아형(阿衡)이라 불렀다. 재형은 이들 두 칭호를 합친 것이니 두 사람의 공적을 겸했다는 뜻이다.

얼마 후 안한공은 가황제(假皇帝)라 칭하였고 사람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도록 하였다.

평제의 후계자로는 황족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두 살의 자영(子嬰)이 옹립되고 연호를 거섭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왕망이 황제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거섭(居攝) 3년(기원전 8) 왕망은 마침내 안한공의 얼굴을 집어던지고 망한공(亡漢公)각주1) 의 본성을 드러내어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 해의 12월 1일을 시건국(始建國) 원년 1월 1일로 하고 국호를 ‘신(新)’이라 칭하였다.

황제가 된 왕망은 사람을 시켜 태황 태후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이때 태황 태후는 80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자기 일족인 왕씨가 유씨의 천하를 찬탈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분을 이기지 못해 옥새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옥새에 새겨진 용의 머리 부분이 망가져버렸다. 옥새를 내던지던 이 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녀는 한나라의 여성으로서 일생을 바쳤으며 204년간 이어오던 전한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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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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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왕망의 찬탈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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