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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진나라의 흥망
여산릉과 아방궁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하면서부터 여산(驪山) 기슭에 자신의 능묘(陵墓)를 만들기 시작하여 50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하였다. 36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이 대공사는 서안시(西安市) 동쪽섬 서성의 임동(臨潼)으로부터 동쪽으로 5~6킬로미터 되는 지점에 실시되었는데 여산릉이라고도 하고 시황릉이라고도 부른다.
1974년 봄 여산릉 동북쪽 약 1킬로미터 되는 지점에서 우물 파는 공사를 하던 중 고대의 도용(陶俑)각주1) 파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후 조사 발굴 결과 2천여 년간 땅속에 묻혀 있던 시황제의 근위병 도용에서 완전 무장한 병사·군부(軍夫) 및 병사를 태운 전차를 끄는 군마 등 약 6천여 점에 달하는 도용이 발견되었다.
이들 도용은 모두 시황제의 능묘 곁에 있는 배총(陪塚)에서 발견된 것으로 본체인 능묘의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여산릉의 높이는 116미터, 주위의 길이 2.5킬로미터, 사방이 각각 약600미터에 달하는 대규모 능묘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묘실(墓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있어 3차례에 걸쳐 수층(水層)을 제거했다고 하며 관은 동으로 주조(鑄造)했다고 한다. 능묘 안에는 궁전·누각·회랑(廻廊) 등이 있어 많은 진기한 보물이 들어차 있었다. 또 시황제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능묘 안의 돔식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새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반짝이고 지면에는 수은을 이용한 하천과 호수가 만들어져 천문·지리·현세의 천하가 펼쳐져 있다. 또 실내에는 문무백관의 자리가 차례대로 벌여 있고 경유(鯨油)각주2) 에 의한 조명이 점등되어 있다. 묘실에는 활을 장치해 도굴자가 침입하면 즉시 화살이 쏘아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상의 건물도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모두 타버려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운데 2천여 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묘실이 열리는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에는 진왕조 전성기의 경제·문화 수준이 밝혀질 것이고 진나라가 불과 15년의 단명 왕조로 막을 내리게 된 원인도 보다 소상히 밝혀질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여산릉의 조영 공사에만도 무려 75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여산릉의 조영 공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또 하나의 대토목 공사는 아방궁(阿房宮)의 건축 공사였다. 역대 이래로 써오던 함양궁은 협소하여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의 궁전으로는 위엄이 서지 않았다. 이에 아방궁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 아방은 원래 지명으로 임시로 붙인 이름이었다. 궁전이 완성된 후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기로 하였는데 아방궁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의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아방궁을 지을 때 맨 먼저 전전(前殿)을 짓기로 하였는데 동서의 길이가 5백 보(步), 남북이 50장(丈), 위층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다섯 질이나 되는 기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아방궁 건축 공사에도 무려 70만 명의 강제 노역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만리장성의 공사에 30만 명, 영남 개발에 50만 명, 전국의 도로 공사, 또는 비대해진 공공 건물에 따른 잡역(雜役) 등을 합친다면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무상 노역에 동원된 셈이니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국 시대 이래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온 백성들은 평화를 갈망하고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으나 통일 후의 진왕조가 백성들에게 베푼 것은 과중한 조세와 부역, 가혹한 법과 형벌, 굶주림과 죽음뿐이었다. 백성들에게는 온 나라 안이 큰 감옥과 같이 느껴졌다.
진왕조의 지주 정권과 농민 계급과의 이 같은 모순은 점차 격화하여 시황제가 죽은 다음해(기원전 209) 가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 영화를 꿈꾸던 진왕조는 삽시간에 붕괴 전야의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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