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사1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과 인문과학
노자
老子도가(道家)의 창시자는 노자이다. 노자의 성은 이(李) 또는 노(老)라고 하고 이름은 이(耳) 또는 담(聃), 자는 백양(伯陽)으로 노양자(老陽子)라고도 불린다.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하남성 녹읍현) 태생으로 그의 집안은 아주 신분이 높은 귀족이었다.
노자는 한때 주나라 왕실의 도서 관리자로 일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노나라로 망명했다. 당시 17세였던 공자가 주례(周禮)에 대해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노자의 나이는 공자보다 20세 정도 위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의 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이 전국 시대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는 사실로 미루어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보기는 어렵고 공자보다 훨씬 뒤의 인물일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노자가 그 만년에 소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나서려 하는데 노자를 숭배하는 한 함곡관의 관리가 “소생은 선생님을 하늘같이 받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원컨대 한 권의 책을 얻고자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노자는 이에 5천 자로 이루어진 《도덕경(道德經)》을 써서 그 자에게 주고 함곡관을 떠났다. 그 후 부풍(扶風)이라는 곳에서 죽고 괴리(槐里)에 안장되었다. 부풍은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의 동남쪽이고 괴리는 당시 부풍의 행정 중심지였다.
《도덕경》은 일명 《노자》라고도 불리며 이 책에는 노자의 철학 사상과 정치 사상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도(道)’의 철학 개념은 노자의 설에 의하면 자연 자체, 즉 만물의 기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나 묵자처럼 인류를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것은 쓸데없는 짓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만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도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 가운데는 소박하면서도 풍부한 변증법과 원시적인 유물론(唯物論)의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철저한 것은 아니고 최종적으로는 관념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소국과민(小國寡民)각주1) ’이었다.
즉 “이웃 나라를 이웃 동네처럼 바라볼 수 있고 닭이나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소규모적인 부락 단위의 국가”를 주장하고 있다.
노자가 이 같은 정치적 이상을 갖게 된 배경은 그가 노예제도의 부패상을 보아왔고 신흥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도 사회 발전의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원시적인 경제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이상적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상은 노예제를 부정하기는 하였으나 역사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결코 전진적(前進的)인 것은 아니었다.
최근 호남성의 장사에 있는 마왕퇴(馬王堆)에서 두 종류의 사본으로 된 《도덕경》이 발견되었고, 이 사본이 개정, 출판됨으로써 노자의 철학적 저술의 역사적 지위는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노자》를 전략·전술에 관해 논술한 병법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이 저술이 단순한 군사적인 수단에 관한 것이 아니고 철학자가 철학자의 입장에 서서 군사에 대해 논술한 철학적 저술이라는 점에서였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