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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오월의 명검
오나라와 월나라가 한때 강성했던 원인의 한 가지는 그 지방의 제철(製鐵) 기술이 중원의 선진 기술보다 앞서 이를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청동의 기술은 중원에서 먼저 발달했으나 강철을 다지는 제철 기술은 오·월이 훨씬 앞서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출토된 오·월의 명검에서도 그 일례를 찾아볼 수 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월왕 구천의 검’은 직접 구천의 명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호북성 강릉에 있는 망산(望山)에서 발견된 것으로 1965년부터 다음해까지 발굴된 전국 초묘(戰國楚墓)의 제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이 칼자루 가까이에는, ‘월왕 구천 자작용 검(自作用劍)’이라는 여덟 자의 조전(鳥篆)각주1) 이 새겨져 있고 칼 콧등의 양쪽에는 남색의 유리와 공작석(孔雀石)의 무늬를 새겨 넣었고 칼 전체에는 연꽃 무늬를 장식하여 고도의 합금 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1976년 호북성 양양에서 발굴된 채파(蔡坡) 12호분에서 오왕 부차의 칼이 출토되었다. 초나라 영토 안에 있는 전국 시대의 묘에서 월왕 구천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진 명검과 오왕 부차의 명검이 출토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명검들은 초왕에게 선물로 바쳐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보다는 기원전 4세기경 초나라가 월나라를 병탄했을 때 전리품으로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더 짙다. 아마도 오왕 부차의 칼이 일단 월나라로 넘어갔다가 다시 초나라로 넘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 1오왕 부차의 검
- 2월왕 구천 자작용 검
월왕 구천과 싸우다가 손가락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은 오왕 합려는 해용산(海湧山)에 장사지내졌다. 지금의 소주 교외의 호구(虎丘)가 바로 그곳이다. 당시 10만의 인부를 동원하여 만든 무덤으로 담을 세 겹으로 쌓고 무덤 안에 3천 자루의 칼을 묻고 수은으로 연못을 만들었으며 금은주옥으로 물새를 만들어 그 연못에 띄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로부터 270년 후 진(秦)의 시황제가 그 명검에 호기심을 갖고 오왕 합려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그러나 발굴 도중에 맹호가 나타나 이 발굴 작업을 방해했기 때문에 부득이 중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해용산은 호구라 불리었고 도굴 공사로 인하여 생긴 큰 구덩이에는 물이 괴어 연못이 되니 사람들은 이 연못을 검지(劍池)라고 이름지었다.
천하를 통일하고 천하의 부를 한몸에 가졌던 진의 시황제조차 호기심을 가졌던 이 명검을 만들어낸 도장공(刀匠工)은 과연 누구였을까?
오왕 부차의 아버지 합려 때의 일이다. 월나라에서 3자루의 보검을 보내왔는데 일찍이 오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명검이었다. 당시 오나라와 월나라는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서로 지지 않으려는 경쟁 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을 만드는 기술에 있어서는 오나라가 월나라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왕 합려는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보다 훌륭한 칼을 만들라.”
오왕 합려는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절강성 항주의 서북쪽 대나무숲과 폭포로 둘러싸인 깊은 산중에 간장(干將)과 막야(莫邪)라는 뛰어난 두 도장공이 살고 있었다. 막야는 간장의 아내였다. 오왕의 명을 받은 이들 두 도장공은 오산의 철정(鐵精)과 육합(六合, 천지와 사방)의 금영(金英)을 캐내고 천지 신명께 기도드리며 음양의 조화를 기다려 여러 신령이 강림한다는 최고의 조건하에서 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작업 도중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용로(熔爐) 안의 쇳물이 엉겨붙어 굳어버린 것이다.
도장공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찍이 그들이 스승으로부터 도장 기술을 배울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그의 스승 부부는 용로 안에 몸을 던져 겨우 쇠를 녹인 일이 있었다. 막야는 자신의 머리털을 자르고 손톱을 깎아 그것을 용로에 던지고 동남동녀(童男童女) 8백 명으로 하여금 풀무를 불게 하니 이윽고 엉겨붙었던 쇳물이 녹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대신 그 분신인 머리털과 손톱을 집어 넣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3년의 각고 끝에 드디어 자웅 한 쌍의 보검이 만들어졌다. 이 칼은 그들 부부의 이름을 따 ‘간장·막야’로 이름붙였다. 양(陽)의 간장에는 거북 무늬를 새겼고, 음(陰)의 막야에는 물결 무늬를 새겼다.
간장은 이 한 쌍의 칼을 어루만지다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양검인 간장은 집에 감춰 두고 음검인 막야만을 왕에게 바쳤다.
칼을 받아 든 왕은 전문적인 감정가에게 명하여 그 칼의 진부를 감정토록 하였다.
감정 결과는 정확하였다. 제작 기간이 3년이나 걸렸고 자웅 한 쌍의 칼 가운데 자검(雌劍)이라는 것이었다. 왕은 노하여 그 자리에서 간장의 목을 베었다.각주2)
간장은 칼을 바치러 집을 떠날 때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다. 칼을 바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간장은 임신 중인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남자가 태어나거든 장차 자란 후 내 원수를 갚도록 하시오. 문을 나서 남산을 바라보면 돌 위에 소나무가 나 있는 곳 뒤쪽에 칼을 묻어 두었소.”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두 눈썹 사이가 유별나게 넓어 이름을 미간척(眉間尺)이라 지었다. 두 눈썹 사이가 넓으면 소견이 시원스럽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간척은 건강하게 자라 성인이 되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복수를 결심했다. 문제의 명검을 찾기 위해 남산을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자기 집 주춧돌 위에 세워진 기둥 나무가 소나무임을 안 미간척은 기둥 뒤쪽을 도끼로 파내어 그곳에 숨겨진 명검을 찾아냈다. 명검을 찾아든 미간척은 비장한 결의를 품고 복수의 길을 떠났다.
한편 간장의 명검을 받고 그를 죽인 왕은 까마득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들이 성장했으니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자칭 간장의 아들이라는 자가 꿈에 나타나 “나는 간장의 아들 미간척이다. 내 아비의 원수를 갚으러 왔으니 내 칼을 받아라.” 하며 왕의 목을 치려 하자 깜짝 놀라 꿈을 깨었다. 왕은 까마득히 잊었던 그 옛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즉시 화공을 불러 꿈에 나타났던 미간척의 형상을 그리게 하고 천 금의 현상금을 걸어 미간척을 전국에 수배했다.
미간척은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산에 들어가 비통한 심정을 노래에 담아 울고 다니다가 하루는 어떤 협객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협객은 울고 다니는 연유를 알자 자기가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나섰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미간척의 목과 명검이 필요했고, 미간척은 선뜻 그 뜻을 알아차렸다.
“고맙습니다.”
한마디 인사말을 남기고 서슴 없이 자신의 목을 잘라 빳빳이 선 채 두 손으로 목과 칼을 협객에게 바쳤다.
협객이 목과 칼을 받아들고 “알았네, 나 그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꼭 원수를 갚아주겠네!” 하고 맹세하는 말을 하자 빳빳이 선 채로 있던 시체가 넘어졌다.
미간척의 목을 들고 왕을 찾아가자 왕은 매우 만족해했다.
“응, 틀림없는 그자로군! 내 이제야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군!”
협객은 천 금의 현상금을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협객은 왕에게 아뢰었다.
“성질이 모진 사람은 죽은 원혼도 모진 법이오니 이 자의 목을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삶아 흔적조차 없도록 하여 재앙의 빌미를 근절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가마솥에 넣어 삶도록 하였다. 3일 동안을 계속해서 삶았는데도 그 형상은 하나도 풀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열탕 안에서 눈을 부릅뜬 채 목이 뛰어올랐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 놈의 목은 조금도 삶아지지를 않습니다. 이런 때는 왕께서 직접 그 놈의 목을 노려보시면 삶아질지도 모르옵니다.”
협객이 이렇게 아뢰자 왕은 그 말대로 가마솥 곁에 서서 펄펄 끓는 열탕 속을 쳐다보았다.
협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잽싸게 칼을 뽑아 왕의 목을 쳤다. 왕의 목은 열탕 안으로 툭 떨어졌다. 순간 협객도 자신의 목을 툭 치니 협객의 목도 열탕 안으로 떨어졌다. 가마솥에서는 세 사람의 목이 용솟음치는 끓는 물에 곤두박혀 어떤 것이 누구의 목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을 함께 장사지내고 그 무덤을 삼왕묘(三王墓)라 이름지었다.
전국 시대에는 이 밖에도 명검에 관한 전설이 많다. 이름난 도장공으로는 간장과 막야 외에도 구야자(歐冶子)라는 명도장공이 있었다. 구야자는 간장의 스승이었다는 설과 동문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구야자가 만들었다고 하는 ‘순균(純鈞)’이라는 명검은 천하의 지보(至寶)였다. 칼의 감정가로 이름을 떨친 설촉(薛燭)은 순균의 가치를 값으로 따지면 시(市)가 있는 두 고을과 군마 1천 필, 그리고 1천 호의 도시 2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하였다.
명검의 명칭도 간장·막야·순균 외에 용연(龍淵)·태아(太阿)·담로(湛盧)·어장(魚腸)·거궐(巨闕)·공포(工布)·승사(勝邪) 등이 유명하다.
명검에 대한 이야기의 무대나 등장 인물이 오나라·월나라·초나라의 세 나라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제철 기술이 가장 먼저 발달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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