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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과 인문과학
공자
孔子유교의 개조이자 동양 최고의 성인으로 꼽히는 공자는 성이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는 주(周)의 영왕(靈王) 20년(기원전 552)에 노(魯)나라, 즉 현재의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나라의 대부(大夫) 숙량흘(叔良紇)이며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최근에 이르러 공자의 양친이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사이였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공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대부로서 무용을 떨친 바 있는 그의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당당했고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달리 무(武)를 멀리하고 문(文)에 힘을 기울였다.
52세 때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결코 높은 벼슬은 아니었으나 이듬해 협곡(夾谷)에서 열린 제나라와 노나라의 회담에서 제나라의 책략을 분쇄하고 노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공로로 공자는 대사구(大司寇)라는 최고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다. 원래 공자는 신흥 세도가들의 무력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을 싫어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들 무력적인 신흥세력들을 견제하고 노나라의 임금을 제자리에 올려 놓으려고 노력했다. 한때는 이 같은 공자의 노력이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공자는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56세(기원전 497)에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약 14년간 다른 나라를 방랑했다. 그간에 세 차례 노나라에 돌아온 일이 있었으나 그의 방랑 여정은 불행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몇 차례 수난까지 겪어야 했다. 송나라에서는 환퇴(桓魋)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의 박해를 받았고 또 광(匡)이란 지방에서는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 또 진(陳)과 채(蔡)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고생한 일도 있었다.
공자는 그의 이상인 인(仁)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덕 있는 임금을 만나 그를 도와 인정(仁政)을 베풀어 천하를 바로잡아 보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포부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공자는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교육, 즉 지식인들의 양성과 아울러 저술에 뜻을 굳히고 69세(기원전 484)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가 정리한 저술은 다음과 같다.
인생 철학을 논한 《역경(易經), 주역》, 고대의 시가를 수집, 정리한 《시경(詩經)》, 주대(周代)의 문물 제도와 이에 부수된 사항을 기술한 《주례(周禮)》, 상고로부터 하(夏)·은(殷)·주(周) 삼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문헌을 수집, 정리한 《서경(書經)》, 232년에 걸친 춘추 시대를 편년체(編年體)로 엮은 역사책 《춘추(春秋)》, 음악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논한 《악기(樂記)》 등을 들 수 있다.
이 여섯 가지 저술은 ‘육경(六經)’이라고 불리어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육경 가운데 《악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가의 스승과 제자들이 기술하거나 전수하여 세상에 널리 전파되었다. 이 밖에 정리되지 않은 고서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부분 소멸되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중국 고대 민족문화의 보존과 전파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공자 이전의 학문은 전적으로 정부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으나 공자가 스스로 제자를 모아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는 정부에 의해 주도되던 교육이 지양되었을 뿐 아니라 귀족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특권이 타파되었다.
공자의 제자는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귀족의 자제들이었고 개중에는 중류층이나 하층 계급에 속하는 자도 있었다.
현실 참여와 정치 개혁에는 실패하였으나 교육과 학문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3천 명에 이르는 제자 가운데에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그는 학문의 개조이자 도덕·윤리의 계발자이며 학교 교육의 창시자였다.
수천 년간에 걸쳐 동양에서 그 정통의 자리를 지켜 온 유교의 가르침은 첫째, 신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인간 정신의 계발과 수양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궁극적 정신의 계발의 경지에 가서는 유교도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도달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유교에서 첫째로 내세우는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현세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인격적 수양이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나의 정신을 더욱 닦아 높이면 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내세에 가서 구원받기를 원하기에 앞서 우선 현세를 올바르게 살라고 주장했다. 신의 권위나 사랑의 섭리에 따라 구제되기를 기다리기 앞서 먼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인류애(仁)를 실현하고 사회질서(倫理)로써 바로잡고 또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써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실천을 강조했다.
또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정치적 원동력을 권력이나 법에서 찾지 않고 천도를 바라보는 문화적 제도인 예(禮)와 진선미(眞善美)의 조화의 극치인 자연미의 감화력을 지닌 악(樂)으로써 정치와 제사를 일치시킨 제정일치(祭政一致)와 또 정치를 감화와 교육으로 이끄는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이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무력이나 법의 구속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은 패도정치(覇道政治)라 하여 이를 배척하고 어디까지나 천도를 따른 인륜 위에서 교화함으로써 스스로 따르게 하는 왕도덕치(王道德治)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 왕도 정치의 바탕은 위정자나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수양하고 학식을 쌓고 덕행을 닦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즉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방법이다.
유교는 이와 같이 수신에서 출발하여 제가·치국·평천하를 구현하자는 가르침이다. 이는 옛날만이 아니고 바로 오늘의 세계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효(孝)와 사회협동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인(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내걸고 구현하고자 하였다.
공자가 죽은 후 그는 봉건 사회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을 뿐 아니라 ‘소왕(素王)각주1) ’ 또는 ‘지성선사(至聖先師)각주2) ’로도 추앙되어 그 명예는 2천 년간이나 계속 이어졌다.
1911년 중국 최후의 봉건 왕조인 청나라가 쓰러진 후 특히 1919년의 ‘오사 운동(五四運動)’ 이후의 신문화 운동에서는 유교 사상을 봉건 사상의 잔재로 보는 등 공자에 대한 인식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피상적인 식견으로 공자를 낡은 사회와 가치관을 옹호하는 비진보주의자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공자는 비현실적·비합리적 처사를 반대했을 뿐이다. 또한 전통 위에서의 새로운 창조를 주장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발전적 성장을 강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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