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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진나라의 흥망
유방과 항우의 세력 분포
진나라 장수 장한이 진승의 주력부대인 주문의 30만 대군을 격파하자 2세 황제는 크게 힘을 얻어 장군 사마흔(司馬欣)·동예(董翳)등을 파견하여 장한의 반란군 토벌 작전을 도우니 진나라 군대는 연전연승 기세가 등등하였다.
진승·오광의 봉기를 신호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제는 끝장이다.’라고 생각했던 백성들은 진나라 군대의 연전연승 소식을 듣자 ‘그래도 천하의 주인인 진나라의 힘이 반란군을 무찌를 힘이 있다’고 다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승의 명을 받고 조나라로 파견된 무신이 조왕이라 칭했고 얼마 후 하찮은 일로 죽임을 당했다.
하찮은 일로 조왕 무신을 죽인 사람은 바로 그 막하에 있던 이량(李良)이란 자였다. 이량은 무신의 명령으로 산서성의 상산을 공략하고 다시 태원을 치기 위해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도중에 진나라 군대가 험난한 곳에 진을 치고 있어 도저히 진격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량은 무신이 있는 조나라 수도 한단으로 돌아가 원군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진군으로부터 천자의 사자라고 칭하는 자가 칙서를 가지고 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게 웬일일까. 이런 때 천자의 사자라니, 믿을 수 없군.”
이량은 반신반의하면서 그 칙서를 뜯어보았다.
“이량은 일찍이 진나라의 신하로서 관직에 올라 총애를 받았다. 이제 마음을 고쳐 먹고 진에 충성을 다한다면 그 죄를 용서하고 높은 관직을 내리겠노라.”
이량이 보기에 그 칙서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칙서의 내용도 그러려니와 봉함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건 분명 가짜로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과연 우리들의 반란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량이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한단의 교외에 이르렀을 무렵 백여 기를 거느린 행렬과 만났다.
“아, 조왕 무신의 행렬이 틀림없구나.”
이량이 말에서 내려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그 행렬은 조왕 무신이 아니고 소풍을 나갔다가 술이 만취해 돌아오는 무신의 누이의 행차였다. 그녀는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일어나 인사할 수 없을 정도여서 그의 사자에게 명해서 인사를 대신케 했다.
“수고가 많소이다.”
이량이 인사를 받고 사자를 바라보니 안면이 없는 자였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시오?”
이량의 부하가 물었다.
“조왕의 누님 되시는 분이다.”
사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자못 교만한 태도로 말머리를 돌려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량의 부하는 얼굴이 상기되어 “결례가 아닙니까? 장군께서 엎드려 인사를 하였는데 저 여자는 수레에서 내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사자에게 인사를 대신하게 했습니다. 이는 장군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이량의 가슴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앞서 받은 천자의 칙서가 머리에 떠올랐다.
“혹시 그것이 진짜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곧바로 쓰러질 줄 알았던 진나라가 계속 승세에 있지 않은가.”
이량의 마음은 흔들리고 말았다.
“조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에 돌아가자.”
이량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 여자의 일행을 쫓아가서 죽여 없애라!”
조왕 누이의 일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 이량은 계속 전군을 채찍질하여 한단에 이르렀고, 조왕 무신의 목을 베어 죽였다.
조왕 무신의 막하에 있던 장이와 진여는 재빨리 몸을 잘 숨겨 이량이 점령한 한단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수만의 군사를 모아 전국 시대 조왕의 유족인 조혈(趙歇)을 조왕으로 추대하고 신도(信都, 하북성)에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량은 신도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장이·진여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갈 곳을 잃은 이량은 마침내 진나라 군대에 투항하여 장한의 부하가 되었으며 장이·진여는 신도로부터 다시 한단으로 돌아왔다.
진승의 명을 받고 남양을 평정한 송류(宋留)는 진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하고 진군에 투항했다. 그러자 진군은 송류를 함양에 보내어 본보기로 차열(車裂)각주1) 형에 처하여 죽였다.
진가(陳嘉)는 담(郯)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진승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구(景駒)라는 사람을 초왕(楚王)으로 추대하고유(留)각주2) 땅에 자리잡았다.
패공(유방)이 이 소식을 듣고 경구에게 가고 있었다. 도중에 장량(張良)을 만났다. 장량도 또한 경구에게 가는 도중이었다. 이 만남이야말로 패공(유방)에게는 천하를 얻는 만남이요, 장량에게는 왕자의 스승이 되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야 누가 이들의 만남을 그렇게 보았겠는가? 지금까지도 모사의 제 일인자인 명참모를 ‘장자방’이라 부르고 있다. 이 장자방은 다름 아닌 장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막 안에 앉아서도 천리 밖의 승패를 한눈에 들여다보는 지략가이다. 이러한 장량이 일찍이 박랑사에서 시황을 저격했다가 실패한 후 망명 생활을 보내면서 천하의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패공(유방)과 만나게 된 것이다.
박랑사 저격 사건 후 장량은 몸을 피하여 하비(下邳)라는 곳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다리 부근에서 베옷을 걸친 백발 노인을 만났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한 노인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노인이 다리를 건너다가 한쪽 신발을 다리 밑에 떨어뜨리고 장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젊은이, 내려가 신을 주워 오게.”
장량은 화가 났으나 마음을 고쳐 먹고 신발을 주워 왔다. 그러자 노인은 발을 내밀었다. 장량은 꿇어앉아 신을 신겨드렸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마을 쪽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와 “젊은이, 가르쳐 줄 것이 있으니 5일 후 아침 일찍 이곳으로 오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장량은 5일 후 아침 일찍 다리 있는 곳으로 갔다.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젊은이, 무례하군. 어른과의 약속에 늦게 오다니!”
장량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노인은 장량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무언의 질책이었다.
“다시 5일 후 아침 일찍 이곳으로 오게.”
장량은 5일 후 첫닭이 울 무렵에 떠났다. 그러나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노인은 크게 노하였다. “젊은이, 안 되겠군. 그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원!”
장량은 몸둘 바를 몰랐다. 땅바닥에 엎드려 재삼 사죄하였다. 장량은 5일 후 밤중에 떠났다. 다리 부근에 이르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동안 기다리고 있으니까 노인이 한가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응, 와 있었군!”
노인은 기분이 좋았다.
“현명하신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장량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품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장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책을 열심히 공부하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일세. 앞으로 10년 후면 왕자가 나타날 것이니 열심히 공부하게.”
날이 밝자 장량이 그 책을 펼쳐보니 《태공병서(太公兵書)》였다. 주나라 최고의 건국 공신 태공망 여상이 쓴 책이라 전해지고 있지만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장량은 이 태공병서를 공부하여 왕자의 스승이 되는 길을 터득하였다고 하며, 그 노인은 황석(黃石) 노인이라고만 전해지고 있다.
유방이 장량과 처음 만났을 때 유방은 수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장량은 백여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방이 장량에게 “천하를 경영하는데 무슨 묘책이 없을까?” 하고 물었다.
“지금 천하의 인심은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무엇인가 확실한 것은 없을까 하고 사람들은 찾고 있습니다. 태공망의 병서에는 확고부동한 것을 사람들에게 주는 사람이야말로 천하를 경영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량이 대답하자 패공(유방)은 장량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잘못이 있을 때 장량이 그것을 지적하면 순순히 따랐다. 장량은 패공(유방)의 이 같은 인품에 감탄하였으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은 윗사람으로서 어려운 일인데 패공(유방)은 이를 능히 해내니 이분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분이라 감탄하고 패공(유방)을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패공(유방)이 근거지로 삼은 패현의 서쪽 가까운 곳에 풍현(豊縣)이 있었다. 패공(유방)이 풍현을 빼앗아 옹치(雍齒)라는 자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옹치는 그 고장의 이름난 선비로 전부터 패공(유방)을 무뢰한이라 하여 무시해왔는데 이제 그 무뢰한 밑에 예속되었으니 그는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만을 품고 있을 때 위(魏)로부터 연락이 왔다.
“진승이 봉기한 이래로 진에 멸망된 6국이 각지에 왕을 세우고 있다. 위왕 고(咎)도 그중의 한 사람인데 모든 면에서 패공(유방)보다 낫다. 위왕을 섬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옹치는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었다. 위를 등에 업고 패공(유방)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패공(유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즉각 풍현을 공격했지만 옹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켜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단숨에 함락될 줄 알았던 풍현이 뜻대로 함락되지 않자 패공(유방)은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방은 즉시 진가가 초왕으로 옹립한 경구가 있는 유 땅으로 가서 군사를 빌려오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진의 장군 장한의 부대가 그 일대까지 진출해 있었다.
유방은 소(蕭, 서주 서쪽)에서 진의 군사와의 싸움에서는 패했으나 탕(碭)을 공략하여 승리했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유방의 휘하 군사는 3천에서 9천으로 늘어났다. 유방과 장량이 만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진승이 봉기하자 각지의 호걸들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으나 이 가운데서도 역대 장군 출신인 항량이 가장 우세하였다. 만약 진승이 싸움에 불리하여 전사할 경우 그 주도권은 항량에게로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진가가 경구를 초왕으로 추대한 것은 그 주도권을 장악하여 봉기군의 주류는 이쪽이라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었다.
항량은 진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강동의 정병 8천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진영(陳嬰)은 항씨가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였다고 하여 곧 군대를 거느리고 항량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경포와 포장군(蒲將軍)도 또한 군대를 이끌고 항량의 휘하로 들어갔다.
경포는 육(六)현 출신으로 성은 영씨(英氏)이다. 장년이 되어 경형(鯨刑)각주3) 에 처해졌기 때문에 경포라 불린다. 소년 시절 어떤 사람이 그의 관상을 보고 “형벌에 처해진 뒤에 왕이 되겠다.”라고 하였다.
장년이 되어 법에 걸려 경형에 처하게 되자 그는 기뻐하여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나의 관상을 보고 형에 처해진 뒤에 왕이 되겠다고 하더니 아마 이것일 것이다.”라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를 놀리며 웃었다. 나중에 경포는 과연 항우의 선봉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지니 관상가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었다. 그는 형의 언도를 받고 여산으로 옮겨져 부역에 종사하였다. 여산에는 수십만 명의 죄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경포는 그 무리의 장인 호걸들과 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장강을 무대로 군도(群盜) 노릇을 하였는데 항량이 서쪽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경포 쪽에서 자진하여 휘하에 들어오겠다고 희망하였으며 항량 또한 병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경포와 항우와는 원래 기질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유방과 항우가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일 때 경포를 꾀어 항우를 배반하게 하여 항우의 진영에 막대한 타격을 준 일이 있었다. 꾐에 빠져 배반한 경포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자기 진영의 중요 인물을 장악하지 못한 항우에게도 물론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항량의 군사는 6, 7만 명으로 늘어났다. 항량은 이들 군사에게 호령하였다
“진왕 진승이 진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이때에 진가라는 자가 외람되이 경구를 초왕으로 추대하니 이는 진왕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그 자를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리고 군사를 진격시켰다. 진가는 호릉(胡陵)에서 잡혀 죽고 경구 또한 도망치다가 항량의 군사에게 잡혀 죽었다. 이로써 항량의 병력은 진가·경구의 군사를 더하여 10만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대단한 병력이었다.
이에 비해 유방의 군사는 9천 명에 불과했으니 비교할 수조차 없다. 유방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앞에 있던 장량이 패공(유방)의 심정을 헤아리고 “항량에게 가서 5천 명 정도의 군사를 빌려다가 풍현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권유했다.
“5천씩이나 빌려줄까?”
유방은 장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2천이라면 빌려주지 않을지 모르오나 5천이라면 반드시 빌려줄 것입니다.”
장량은 자신 있게 말했다. 항량은 과연 5천의 군사를 빌려주었다. 패에 돌아온 유방은 장량에게 2천과 5천의 숫자에 대하여 물었다. 장량은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패공(유방)께서는 9천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2천의 군사를 빌렸을 경우 2천은 9천 속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빌려준 쪽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저 주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5천으로 했을 경우 이는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 숫자입니다. 쉽게 흡수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대의 중추가 되어 전군의 향방을 움직이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태 여하에 따라서는 5천으로 9천의 군대를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방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방은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장량이 하는 말이라면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유방은 1만 4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풍현을 공략하여 함락하고 패에 돌아왔다.
장량은 유방에게 말하였다.
“지금 주군께서는 항량의 군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천의 군사를 빌렸기 때문에 그 군사를 항량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계시오나 조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이쪽에서도 그 밑에 속해 있는 것을 잘 이용하여 상대를 빼앗을 궁리를 해야 합니다.”
유방은 눈을 끔벅였다. 그건 어려운 일이라고 무언의 눈짓을 보낸 것이다. 패공(유방)의 속뜻을 알아차린 장량은 다시 부연하여 말하였다.
“항량이 처음 거느린 강동의 장정은 8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자연히 불어나 지금은 10만이 되었습니다. 군사의 수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10만이나 20만은 언제든지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10만이나 20만의 군대는 언제든지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장량의 말뜻을 깊이 음미하고 있었다.
얼마 후 진왕 진승이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군은 구심점을 잃게 된 것이다. 새로운 구심점으로 등장한 사람은 역대 장군을 지낸 명문 출신으로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린 항량이었다. 항씨 가문은 초나라 장군 계통으로 이 일족에는 전형적인 군인 기질의 인물들이 많았다.
항량의 조카 항우는 숙부의 명을 받고 양성(襄城, 하남성)을 공격했으나 군사들이 굳게 지켜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고전 끝에 성을 함락하자 항우는 불끈 화를 내면서 “이 성의 군대는 모두 지독한 놈들뿐이다.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려라.”하고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생매장하였다.
2세 황제 2년 항량은 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진영의 장수를 설(薛)이란 곳에 소집하였다. 여러 장수를 소집한 것은 항량이 봉기군의 주체로서 진승의 죽음을 확인하고 금후의 방침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항량은 남의 의견 따위에 별로 귀를 기울이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자신에게 확고한 방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하나 중요한 목적은 소집의 주체가 됨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춘추 시대부터 제후를 소집하는 자가 패자로서 인정받았던 선례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거소(居鄛)에 사는 범증(范增)이 찾아왔다. 그는 70세의 노인으로 평소 집에 있으면서 기계(奇計)를 좋아하였다. 항량에게 진언하기를 “진승이 실패한 것은 6국의 유족을 옹립하여 왕으로 삼지 않고 자립하여 왕을 일컬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에 멸망된 6국은 모두 원한에 사무쳐 원수 갚을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초나라 사람들의 복수심은 대단합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회왕이 귀국하지 못하고 진에서 객사한 것을 가엾게 여겨 회왕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비록 세 가구만 남아도 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초나라밖에는 없을 것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진의 깃발을 든 봉기군은 반드시 초왕의 후예를 세워서 왕으로 삼아야 합니다. 봉기한 여러 장수들이 당신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은 당신이 대대로 초의 장군을 지낸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초의 왕족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항량은 범증의 말을 옳게 여겨 진나라에서 객사한 회왕의 손자 심(心)이라는 사람을 옹립하여 초의 회왕이라 칭했다. 이 이름은 진나라에서 망향의 한을 안은 채 객사한 옛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초나라 사람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자는 반진 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일컬었다.
이때 유방도 일군의 장수로서 설 땅의 회합에 참가하였다. 연표에 의하면 이 회합은 2세 황제 2년 6월의 일이고 진승이 죽은 후 반년 뒤의 일로 되어 있다.
이 무렵 진나라 조정에서는 조고의 탈권 공작(奪權工作)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조고는 원래 조나라 왕족의 자손이라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진나라에서는 미천한 신분이었다. 형제가 모두 거세된 환관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학문에 열중하여 공자 호해의 사부(師傅)로 있었을 뿐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시황제의 유서 위조 사건은 조고 외에는 2세 황제 호해와 이사 세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이 세 사람은 다 함께 평생토록 이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을 것인데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어떤 방법으로 이 같은 위조 사실을 취재했을까? 생각해볼 문제이다.
혹시 시황제의 유서가 애당초부터 호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었던 것은 아닐까? 즉 위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유생을 좋아하고 자비심이 깊은 부소에 대한 동정심이 위조설을 만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시황제는 유생들을 매우 싫어하였다. 위정자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인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비자》에 심취하였던 시황제가 유생을 좋아하고 인정이 많은 부소를 황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면 호해는 조고로부터 법률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뒤를 이을 황제의 자격으로서는 부소보다 호해 쪽이 적임자라고 평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조고는 음모를 써서 2세 황제를 즉위시켜 서서히 권력을 쥐게 되자 그 권력을 믿고 자기와 감정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투옥시키거나 처형하였다. 그런 일로 그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언제 대신이 조정에 들어가 정사를 아뢰다가 자기의 이 같은 비행을 헐뜯어 나쁘게 말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를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조고는 기회를 보아 2세 황제에게 아뢰었다.
“천자가 존귀한 까닭은 군신들이 다만 천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천자는 짐이라고 말합니다. 또 폐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젊어서 모든 일에 다 능통하지 못하시니 일을 잘못 처리하시면 곧 폐하의 단점을 대신들에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의 총명하심을 천하에 보이게 하는 바가 못 됩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깊이 금중(禁中)에 편안히 계시면서 사건이 생기면 신과 시중이 그것을 가지고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대신이 감히 의심나는 일을 아뢰지 못하게 되고 온 천하가 폐하의 현명하심을 칭송할 것입니다.”
2세 황제로서도 정사를 보는 일이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놀면서 지낼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2세는 조고의 말을 들어 조정에 나가지 아니하고 금중에만 있었다. 조고는 금중에서 항상 2세를 모시고 있으면서 정권을 한 손아귀에 넣었다.
조고의 최대 라이벌은 승상 이사였다. 두 사람은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한 사이였으므로 서로 의심하는 바가 많았다. 게다가 이사 아들들은 모두 시황제의 딸과 혼인한 사이였으며 이사의 딸들도 또한 시황제의 아들과 혼인한 사이였으므로 이사가 살아 있는 한 조고는 권세를 전단할 수가 없었다.
조고는 이사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하루는 승상 이사에게 말하기를 “관동 지방에 반란군이 들끓고 있는 이때 천자께서는 백성을 징용해서 아방궁의 공사를 계속하시고 개나 말 따위 쓸데없는 완상물을 모으고 계십니다. 신이 간하고자 하나 지위가 미천합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승상께서 하실 일이온데 어찌해서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까?”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내 또한 진작부터 간하고자 하였으나 폐하께서 조정에 나오시지 않으니 만나뵐 수가 없습니다.”
조고는 이사의 말을 듣고 “승상께서 진실로 간언을 드리시겠다고 하면 신이 폐하를 배알할 한가한 시간을 엿보아 승상께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조고는 2세가 한창 잔치를 벌이고 미인들이 앞에 모시고 있을 때를 기다려 사람을 보내어 승상에게 알리기를 “폐하께서 지금 한가하니 오셔서 일을 아뢰시오.”라고 전하였다.
이사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급히 궁전에 이르러 배알을 청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니 2세가 성내어 말하였다.
“내 항상 한가한 날이 많거늘 그런 때에는 승상이 오지 않고 잔치 기분이 한창 흥겨울 때만 골라서 배알을 청하니 승상은 나를 젊다고 업신여기고 있는 거요?”
조고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이상합니다. 저 사구에서의 유서 위조 비밀을 이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미 즉위하여 황제가 되시었고, 신 또한 낭중령(郎中令)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사의 지위는 그대로 승상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뜻이 땅을 베어 받아서 왕 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폐하께서 신에게 아무 말씀 않으시기에 감히 아뢰지 못했사오나 승상의 장남 이유(李由)는 삼천(三川)의 태수입니다. 초나라의 도적 진승 등은 다 승상의 고향 근처 사람이오며 반란군이 삼천 일대를 횡행하고 있어도 이유는 성을 지키고만 있을 뿐 나가 토벌할 생각은 하지 않사옵니다. 신은 이유가 도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아직 그 자세한 증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또 승상은 밖에 있어 그 권세가 폐하보다도 무겁습니다.”
2세는 조고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승상을 심문하고자 하였으나 그 증거가 뚜렷하지 않음을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삼천 태수가 반란군과 내통한 상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런 소식은 이사에게도 전해졌다. 이사는 직접 2세를 배알하고 조고의 음모를 밝히려 하였으나 이때 2세는 감천궁(甘泉宮)에 있으면서 광대놀이를 구경하고 있어 배알하지 못하고 글을 올려 조고를 규탄하였다.
“신이 들으니 신하 된 자의 권력이 임금의 권력과 비슷해지면 위태해지지 않는 나라가 없다 하옵니다. 지금 폐하에게는 나라의 정사를 제 마음대로 하는 대신이 있어 폐하의 위신을 위협하고 있으니 제나라 간공을 죽이고 제나라를 차지한 전상(田常)과 같은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2세는 전부터 조고를 신임하였다.
“그 무슨 말이오? 조고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힘써 노력하는 자로서 아래로는 사람의 정리를 알고 위로는 짐의 마음을 잘 맞게 하오. 조고를 의심하지 마오.”
이사는 다시 간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조고는 본래 미천한 신분으로 아는 것이 없고 이를 탐하여 그치지 않습니다. 그 위세가 폐하에 버금가건만 욕구가 끝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변을 일으킬까 두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세는 이사를 그대로 두었다간 조고를 죽일까 두려웠다. 가만히 조고에게 이사의 말을 이야기하였다.
“승상이 꺼리는 바는 다만 신 조고 한 사람뿐입니다. 신이 죽고 나면 승상은 바로 전상과 같은 변을 일으켜 진나라를 차지하고자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2세는 마침내 이사를 형리에게 넘기고 조고를 시켜 이사의 옥사를 심문하게 하였다.
조고가 모함한 것은 이사뿐이 아니고 우승상 풍거질(馮去疾)과 장군 풍겁(馮劫) 등도 모함하였다. 풍거질과 풍겁은 2세 황제에게 도처에서 반란이 그치지 않는 것은 아방궁의 공사를 계속하기 위한 병역·부역·무거운 세금 때문이니 아방궁 공사를 중지해달라고 간언을 드렸다.
2세 황제는 노하여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대들의 책임이 아닌가?”라고 하여 이들을 형리에게 넘겼다.
배후 조종자는 역시 조고였다. 풍거질과 풍겁은 형리에게 넘겨져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깨끗한 죽음이 낫다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사가 투옥된 채 죽지 않은 까닭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한 것은 오로지 자기의 공적이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 실제로 반역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믿고 전후 사실을 진술하여 2세에게 상서하면 2세가 깨닫고 자기를 놓아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그의 공과(功過)를 들어 옥중에서 상서하였다.
이사의 상서가 올라오자 조고는 아전으로 하여금 그 글을 내버리게 하고 “죄수의 신분으로 어찌 감히 임금께 상서할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조고는 자기의 식객 10여 명을 어사·알자·시중이라고 속이고 교대하면서 이사를 심문하게 하였다. 이사가 죄목을 부인하자 그때마다 다시 매를 치게 하니 이사는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자복하고 말았다. 또 사람을 시켜 삼천 태수 이유를 심문하려 하였으나 사자가 삼천에 이르렀을 때는 항량이 이미 이유를 쳐죽인 후였다.
2세 황제 2년 7월에 이사를 오형(五刑)을 갖추어 논죄하고 함양의 저자에서 허리를 베어 죽였다. 오형이란 가장 잔인한 형벌로 이 형벌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였다. 자신이 만든 형벌에 자신이 당한 것이다.
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이사는 함께 끌려가는 가운데 아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런 개를 이끌고 고향 땅 상채(上蔡)의 동문을 나와서 토끼사냥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젠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하며 부자가 서로 울었다. 이사의 삼족이 모두 멸망당하였다.
이사가 죽자 2세는 조고를 중승상(中丞相)에 임명하여 크고 작은일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여 국사를 전단하게 하니 진나라는 말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2세 황제 2년 9월 진나라 장군 장한은 정도(定陶, 지금의 산동성 서쪽)에서 오랜만에 봉기군을 무찔렀다. 이 봉기군의 총수는 항량이었는데 이 싸움에서 항량이 전사하였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나라 수도였던 한단을 격파하고 거록(鉅鹿, 하북성 남쪽)을 포위하였다. 이때 거록에는 조왕(趙王) 헐(歇)이 있었는데 자주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초의 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으로 하고 범증을 말장, 항우를 차장으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항우는 이 인사에 크게 불만을 품었다. 항량이 죽었으니 상장은 당연히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의는 전군을 안양(安陽, 하북성과 하남성의 경계 지점)까지 진격시키고 그곳에서 40여 일이나 머무른 채 대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항우는 오금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송의에게 진격할 것을 진언했으나 송의에게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 군대와 실컷 싸우게 한 후 지쳐 있을 때 진나라 군대를 때려 부술 계획이었다.
송의는 제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그 사자로 아들 종양(宋襄)을 보내기로 하였다. 때는 11월 엄동설한에 비까지 내려 군졸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으며 또한 그 해는 흉년이 들어 군량이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송의는 제나라로 가는 자식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항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봉기군이 처음으로 패하여 회왕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며 전 장병을 동원하여 송의에게 통솔케 하였으니 이 싸움이야말로 봉기군의 성패를 좌우하는 싸움이거늘 군졸들은 생각지 않고 사사로운 정을 앞세우니 사직을 위하는 신하라 할 수 없다. 그런 위인이 어떻게 상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인물을 상장으로 모시는 군솔들이 가엾다. 그대로 둘 수 없다.’ 이른 아침 항우는 송의의 장막으로 들어가 송의의 목을 베었다. 항우는 송의의 목을 들고 장막 밖으로 나와 전군에게 고하였다.
“회왕의 명령으로 송의의 목을 베었다.”
이에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거록에 포위되어 있는 조군을 구원하러 나갔다. 전군이 강을 건너자 배를 모조리 가라앉히고 가마솥, 냄비, 천막까지도 모두 불살라버렸으며, 3일분의 식량만을 휴대하게 하였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물러나지 않으며 3일 안에 적을 무찔러버리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인 것이다.
거록을 포위한 진군의 장수는 일찍이 항량의 아버지 항연을 죽인 진나라 장군 왕전의 손자 왕리(王離)였다. 장한은 총사령관으로서 거록 남쪽에 본부를 설치하고 용도(甬道)각주4) 를 만들어 보급품을 수송하고 있었다.
항우는 왕리의 군사를 역포위하고 아홉 번을 싸워 크게 이기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이 싸움에서 항우의 군사들은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을 떨쳐 조왕을 구원하러 온 제후의 군대들을 놀라게 하였다. 항우 군사들의 용맹과 능숙한 지휘력에 압도되어 제후의 군대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관전하고 있던 제후의 장군들은 항우의 진문에 와서 그 지휘를 청하니 이제 항우는 초나라뿐 아니라 여러 제후의 상장군이 되어 제후의 군사들이 모두 그 지휘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 초의 회왕은 여러 제후의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진을 멸망시키는 일이다. 맨 먼저 관중(關中)각주5) 에 들어가 그곳을 평정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진나라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싸움에 불리하여 자신을 잃고 감히 먼저 관중을 공격하기를 꺼려 하였다. 그러나 홀로 항우가 그의 숙부 항량이 전사한 것에 분개하여 패공(유방)과 함께 관중을 공격하기를 희망하였다.
회왕은 여러 노장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기로 하였다. 회왕과 노장들은 내심으로 항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항우는 성질이 과격하고 교활하여 서민의 생활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인물이다. 일찍이 양성을 함락하였을 때만 해도 저항이 심했다 하여 항복한 군사들을 모조리 생매장한 일이 있을 뿐 아니라 공격하는 곳마다 잔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대단하였다. 정서군의 장군으로는 관후한 사람을 보내어 의로써 진나라 백성을 효유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는 장군을 골라 보내는 것이 좋겠다.”
여러 노장들의 의견은 이러했다.
이에 회왕은 패공(유방)을 정서군의 장수로 임명하였다.
항우가 거록에서 조왕을 구원하기 위하여 진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패공(유방)은 정서군을 이끌고 창읍(昌邑)으로 나와 거기서 팽월(彭越)의 군사를 합쳤다. 패공(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고양(高陽)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패공(유방)은 역이기(酈食其)라는 모사를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역이기는 진류현 고양 사람으로 어려서 글을 즐겨 읽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생계를 잇기 위해 마을 감문(監門)의 아전 노릇을 하였다. 역이기는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 지방의 호걸들은 그를 등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깊이 재능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패공(유방)의 휘하에 있는 기사(騎士)가 마침 역이기와 한 고향 사람이어서 패공(유방)은 때때로 그 기사에게 그 고장의 어진 사람이 누구인가 묻곤 하였다. 마침 그 기사가 고향에 돌아오자 역이기는 그 기사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패공(유방)은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웅대한 계략이 많다고 하니 내가 한 번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고 싶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주게.”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였다.
“패공(유방)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손님 가운데 유관을 쓰고 오는 자가 있으면 그 갓을 벗게 하고 그 안에 오줌을 누곤 합니다. 사람들과 말할 때에도 항상 유자들을 나쁘게 말합니다. 유생으로서 패공(유방)을 만나 그를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쨌든지 한 번 만나게나 해주게.”
기사가 한가한 틈을 타 역이기의 말을 아뢰니 패공(유방)은 역이기를 고양의 전사(傳舍)로 불렀다.
역이기가 패공(유방)을 뵈러 들어가니 패공(유방)은 마침 걸상에 걸터앉아 두 여인으로 하여금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역이기는 들어가 읍할 뿐 절은 하지 않고 정색하여 말하였다.
“족하는 진나라를 도와서 제후를 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진나라를 깨뜨리려고 하십니까?”
패공(유방)은 역이기를 꾸짖어 말하였다.
“어리석은 선비놈아. 지금 천하가 모두 진나라에게 고통을 받은 지 오래이므로 제후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있다. 어째서 진나라를 도와 제후를 친다는 말 따위를 하는가?”
“족하께서 무리를 모으고 의병을 규합하여 기필코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고자 하신다면 걸터앉아서 장자를 만나는 무례한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패공(유방)은 발씻는 것을 그치고 일어나 옷을 바로잡으며 역이기를 인도하여 상좌에 앉히고 사과하였다.
역이기가 전국 시대 6국이 합종·연횡하던 일을 말하자 패공(유방)은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책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족하께서 오합의 무리들을 규합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은 것이 채 만 명도 못 됩니다. 이런 군사를 가지고 곧바로 강한 진나라에 쳐들어가는 것은 마치 범의 입을 더듬는 것과 같이 위험한 짓입니다. 대체로 진류(陳留) 땅은 천하의 요충지로서 사방으로 탁 트여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며 지금 그 성 안에는 양곡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신이 그곳의 현령과 친한 사이오니 제가 그곳의 사자로 가 그를 달래어 족하에게 항복하게 하겠습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족하께서는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십시오. 신이 내응하겠습니다.”
이에 역이기를 보내고 패공(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진류를 평정하고 그를 광야군(廣野君)이라 일컬었다.
역이기는 자신의 아우 역상(酈商)을 추천하여 그로 하여금 수천 명을 거느리고 패공(유방)을 따라 서남방을 공략하도록 하고 자신은 항상 제후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유세(遊說)하는 일을 맡았다.
진류를 평정한 패공(유방)은 개봉을 공략하였으나 개봉의 진군은 성을 굳게 지켜 좀체 함락되지 않았다. 패공(유방)은 그대로 지나쳐 영양(潁陽)을 공략하고 다시 북상하여 옛 한나라 땅인 환원(轘轅)을 공략하였다. 이곳의 공략에는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 장량이 있었으므로 패공(유방)은 별 어려움 없이 평정하였다.
패공(유방)은 남하해서 남양군을 공격했다. 남양 군수 의(齮, 성은 알지 못함)는 원성(宛城)으로 물러나서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패공(유방)은 그대로 지나가 버리려 하였으나 장량이 반대하였다.
“이곳은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이곳에는 수십 개의 성이 있으며 물산도 풍부하고 군사력도 강합니다. 우리 군사가 그대로 지나쳐서 서쪽으로 간다면 추격해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작전상 그대로 지나쳐도 괜찮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일단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 되돌아올 때는 깃발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원성 쪽에서는 3만의 군사가 지나간 다음 또 다른 3만의 군사가 나타나서 성을 포위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굳게 지키어 싸우는 동안 먼저 지나간 3만의 대군이 다시 돌아와 6만의 대군과 싸워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항복을 청해올 것입니다.”
장량의 계책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과연 남양 태수는 항복을 청해왔다. 패공(유방)이 남양을 항복받은 것은 2세 황제 3년 7월의 일이었다. 패공(유방)은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니 지나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으며 추호의 민폐도 끼치지 아니하자 진나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거록에서 진군을 크게 깨뜨리고 왕리를 사로잡은 항우는 승세를 몰아 진의 총사령관 장한과 장수의 남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패전소식을 들은 2세 황제는 사람을 장한의 진영에 보내어 장한을 책망하니 장한은 앞으로의 일이 염려되었다. 이에 장사(長史) 흔(欣)을 함양에 보내어 그곳의 상황을 탐지하는 한편 새로운 지령과 원군을 받아오도록 하였다. 장사 흔은 함양에 이르러 조고를 만나기 위하여 3일 동안이나 머물렀으나 조고는 만나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의심하여 죽이려 하였다. 흔은 도망쳐 장한에게 돌아와 함양의 정세를 보고하였다.
“지금 조정에서는 조고가 모든 일을 혼자서 전단하고 있습니다. 장군이 설사 반란군과 싸워 이긴다 해도 조고는 그 공을 시샘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장군을 죽이려 할 것이며, 패할 경우 그 패전의 책임을 물어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겨도 죽고 저도 죽을 바에야 차라리 제3의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제3의 방도란 무엇이오?”
장한은 짐짓 알면서도 장사 흔에게 물었다. 흔은 장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항우와 맹약을 맺고 항복하는 일입니다.”
맹약을 맺으려 해도 항우가 들어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항복한 후에도 양성에서처럼 모두 생매장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장한은 아직도 장기전으로 버티면 전혀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망설이고 있었다. 장사 흔이 또 말하였다.
“장기전으로 버티는 동안 조고가 무슨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설사 이긴다 해도 장군의 목숨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한은 이에 항우와 맹약을 맺고 눈물을 흘리며 조고의 일을 말하였다. 항우는 맹약에 따라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세웠으나 그대로 초군 진영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장사 흔을 상장군으로 삼아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을 거느리게 하였다.
항우가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한 데는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었다. 항우는 원래 속전속결로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장수의 남쪽에서 장한과 대치한 것이 40일이나 되고 보니 항우의 진영에서는 군량이 바닥이 날 지경이었고 또 한 가지 서둘러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초의 회왕이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맨 먼저 관중에 들어가서 그곳을 평정하는 자에게 관중의 왕을 삼겠다.”라고 선언한 그 말이 항우의 머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장한과 대치하고 있다가 관중에의 선두 입성을 패공(유방)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서둘러야 한다. 이것이 항우의 속셈이었다.
거록의 싸움에서 제후들의 군사가 그의 휘하로 들어와 항우의 병력은 40만에 이르렀고 또 항복한 장한의 군사 20만을 더하여 항우의 군사는 도합 6,7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항우는 이들 병력을 정비하여 관중으로 입성을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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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방과 항우의 세력 분포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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